만일 빵이 없다면 케이크를 먹어라
최근 한국 정치권에서 영부인의 명품백 수수 논란이 계속 크게 확산되면서 영부인 탄핵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마리앙투와네트와 김건희를 비교한 것이 이슈가 되었다.
마리앙투와네트(Marie Antoinette)는 18세기 말 프랑스의 여왕으로, 루이 16세의 왕비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대공 공작 둥치아의 딸로 태어났으며, 결혼을 통해 프랑스 왕실과 연결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프랑스 혁명 당시에 많은 비난과 비판을 받았다.
마리앙투와네트는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며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했다.
특히, 국가 재정 문제와 국민의 빈곤과 대조되는 그녀의 화려한 생활이 반감을 일으켰다.
"만일 빵이 없다면 케이크를 먹으라"라는 출처 불명의 말이 그녀에게 돌아다녔는데, 이는 국민들에 대한 그녀의 무관심을 상징하는 말로 여겨졌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면서 그녀는 국민들의 적으로 여겨지고 구속되어 국민재판을 받았다.
결국 1793년 10월 16일에 형량이 선고되어 기소되었고, 이후 그녀는 기관에서 처형당하게 되었다.
마리앙투와네트의 몰락은 프랑스 혁명의 한 부분으로 여겨지며, 당시 정치적인 변화와 국민들의 불만의 표현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세계역사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 중에 잔다르크, 마더테레사, 유관순, 신사임당 처럼 존경받는 인물들이 있다면 마리앙투와네트처럼 이렇게 국민의 적으로 추락한 인물들이 있다.
마리앙투와네트가 서양을 대표하는 사치와 부패를 상징하는 여인이었다면 동양에는 필리핀 이멜다를 기억할 것이다.
이멜다는 1929년 마닐라에서 태어났다. 성은 '로무알데스'로, 이름은 '이멜다 로무알데스'이다.
스페인 안달루시아인과 일본인의 후손이다. 미인 대회에서 우승하지는 못했지만 뛰어난 미모로 유명세를 얻어 상류 사회에 진출했다.
1954년에 정치인인 페르디난트 마르코스와 결혼하여 1975년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시장이 되었고, 1979년에는 남편으로부터 주택환경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며, 1986년 피플 파워 혁명을 계기로 남편이 퇴진할 때까지 겸임했다.
1986년 독재자로 군림하던 남편이 실각하면서 함께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이후 대통령 관저 말라카냥궁에서의 호화로운 생활이 폭로 되었다.
패션 쇼에 참가하고 성대한 파티를 열었으며 신발은 무려 3,000켤레나 되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면서 부패 정치인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성경구절중 지헤서로 알려진 [잠언]에 현숙한 여인에 대한 구절이 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치 아니하겠으며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 (잠언 31장 10절~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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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대통령 영부인이 나라를 망친 여인으로 역사에 남지 않기를 바래본다.
- 글쓴이 LaVie
- 전 금성출판사 지점장
- 전 중앙일보 국장
- 전 원더풀 헬스라이프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