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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확행을 찾아서: 살며 사랑하며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

시애틀의 7월, 그리고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에 

작성자
LaVie
작성일
2026-07-08 10:42
조회
73

7월이 시작되었다. 시애틀의 7월은 천국의 날씨라고 한다. 그리고 7월이 오면 어린 시절 나의 집 앞 마당 한구석에서 싱그럽게 익어가던 푸른 포도송이가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는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 첫 구절도 떠오른다. 시인이 모질었던 일제강점기의 어둠 속에서 청포도를 바라보며 평화로운 미래와 조국의 해방을 꿈꾸었듯, 우리에게도 7월은 뜨거운 태양 아래 무언가 풍성하게 결실을 맺기 시작하는 희망의 계절이어야 마땅하다.

 

일러스트=양진경

일러스트 양진경

그러나 미국이라는 낯선 대륙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한인 이민자들에게, 2026년 오늘의 7월은 마냥 싱그럽지만은 않다. 시인의 청포도는 주저리주저리 열려 마을의 전설을 하늘 빛으로 담아내건만, 치열한 이민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우리 삶의 포도송이는 알알이 여물기도 전에 시들어가는 듯해 마음이 무겁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이어지는 살인적인 물가 상승은 이민자들의 삶을 더욱 팍팍하게 옥죄고 있다. 마트에 갈 때마다 무섭게 오르는 식료품 가격에 선뜻 물건을 집어 들지 못하고, 매달 날아오는 렌트비와 공공요금 고지서, 감당하기 버거운 의료비와 보험료는 숨을 턱 막히게 한다. 아메리칸드림의 푸른 꿈을 안고 태평양을 건너왔건만, 끝없는 인플레이션의 파도 속에서 두 개, 세 개의 일을 뛰며 버텨내도 제자리걸음인 것만 같은 현실은 깊은 무력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이 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한 축으로 살아남기 위해 흘리는 눈물은 웅장한 미국의 도심 불빛 뒤로 소리 없이 묻히곤 한다.

하지만 이육사 시인이 청포도 한 알마다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있다고 노래했던 것처럼, 우리 이민자들의 고단한 하루 속에도 결코 바래지 않는 소박하고도 위대한 꿈들이 박혀 있다. 내 아이만큼은 이 땅에서 당당하게 자라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 비록 지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노동을 하지만 언젠가는 온전한 내 삶의 여유를 찾겠다는 열망, 그리고 멀리 고국에 두고 온 가족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일구겠다는 다짐들이다. 우리가 매일 흘리는 땀방울은 그저 버텨내기 위한 생존의 흔적이 아니라, 이 낯선 땅에 우리 가족의 역사를 새로이 써 내려가는 가장 고귀한 수액이다.

시인은 시의 후반부에서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의(靑衣)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다. 시인이 기다리던 손님이 조국의 독립이었다면, 오늘날 모진 물가고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우리 이민자들이 기다리는 '청의를 입은 손님'은 과연 누구일까. 그것은 대단한 기적이 아니다. 노력한 만큼 정당하게 보상받고 안정적인 삶을 누리는 평범한 일상의 회복이며, 이민자라는 소외감 대신 서로를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한인 공동체의 온기일 것이다.

시인은 손님이 오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만"이라며 아이처럼 순수한 대접을 준비한다. 은쟁반에 하얀 모시 수건을 마련하는 그 정성스러운 마음은,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삶의 품위를 잃지 않고 매일 아침 가게 문을 열고, 일터로 향하는 우리 이민자들의 강인한 '회복탄력성'과 꼭 닮아 있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저력 있는 이들이지 않은가.

7월의 태양은 대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낯선 미국 땅에서 저마다의 무거운 짐을 지고 이 힘겨운 계절을 건너고 계실 한인 동포들이여. 치솟는 물가와 고단한 일상에 마음이 꺾일 때마다, 우리 가슴속에 살아 있는 푸른 포도밭을 기억하자. 거대한 미국 사회 속에서 우리는 비록 이방인이자 작은 존재일 뿐일지라도, 우리가 일구어낸 삶의 궤적은 그 자체로 눈부신 전설이다. 언젠가 찾아올 삶의 넉넉한 품을 기다리며, 오늘 하루도 내 삶의 청포도를 푸르게 익혀 나가는 이 땅의 모든 이민자분들의 발걸음에 깊은 위로와 경의를 표한다.

진정 시애틀의 여름이 천국과도 같이 황홀하고 아름답기를 ...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 [청포도]

 

 

  • 글쓴이 LaVie
  • 전 금성출판사 지점장
  • 전 중앙일보 국장
  • 전 원더풀 헬스라이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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