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속도로 달리는 AI, 길 잃은 ‘디지털 이민자’
수십 년 전, 더 나은 미래와 자녀들의 교육이라는 일념 하나로 태평양을 건넜던 한인 이민 1세대들에게 미국은 늘 치열하고도 숭고한 도전의 땅이었습니다.
낯선 언어와 문화적 장벽 속에서도 세탁소의 뜨거운 열기, 그로서리 마켓의 긴 노동 시간, 식당 주방의 분주함을 견디며 밤낮없이 일해온 그들은 오늘날 미주 한인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단단하고 든든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맨손으로 가족의 삶을 일궈내고 자녀들을 주류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키워낸 위대한 거인들이지만, 노년에 접어든 지금 그들 앞에는 인종차별이나 경제적 문제보다 더 차갑고 무서운 ‘디지털’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고 서 있습니다.
최첨단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지능을 추월하느냐를 논하고, 챗GPT가 시를 쓰는 혁명의 시대라지만, 미주 한인 시니어들에게 그 화려한 기술적 성취는 ‘남의 나라’ 이야기 일 뿐입니다.
당장 점심 한 끼를 해결하러 들어간 로컬 식당에서, 친구들과 부담없이 만남의 장소였던 맥도날드에서 마주하는 영어 키오스크 한 대가 그들에게는 거대한 성벽과 같습니다. 주문을 위해 줄을 서 있다가도 뒷사람의 눈치가 보여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게 되는 막막함, 젊은 세대가 스마트폰 하나로 온 세상을 연결하며 기술의 효율성을 향유할 때, 평생을 성실과 인내로 살아온 이민 1세대는 또다시 ‘디지털 이민자’가 되어 일상의 당연한 권리로부터 소리 없이 밀려나고 있습니다.

미주 한인 노령층이 겪는 고통은 일반적인 디지털 소외를 넘어 ‘언어의 장벽’이 결합된 잔인한 이중고입니다. 미국 주류 사회의 기술 발전은 철저히 영어 네이티브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복잡하게 설계된 사용자 인터페이스(UI)와 암호처럼 나열된 약어들, 그리고 시각적인 아이콘들은 영어가 서툰 시니어들에게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선 일종의 사회적 거부 선언으로 다가옵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은행 업무가 모바일 앱으로 완전 전환되고, 병원 예약 시스템마저 온라인으로 일원화되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이제 이들은 자녀의 도움 없이는 은행 계좌를 확인하거나 병원 문턱조차 넘기 힘든 비참한 ‘디지털 종속’ 상태에 빠졌습니다.
광활한 미국 땅에서 스스로 길을 찾아 개척해왔던 당당한 주역들이, 이제는 손안의 작은 기계가 뿜어내는 기술의 가속도 앞에서 깊은 자괴감과 존재론적 고립감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소외가 개인의 자존감을 깎아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정보 불평등과 건강권 침해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긴급 재난 정보나 정부의 복지 혜택 안내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서만 제공될 때, 기기 조작에 서툰 한인 시니어들은 사회적 안전망 밖으로 밀려납니다.
기술이 인간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면, 가장 도움이 절실한 이들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함에도 현실은 정반대로 흐르고 있습니다. 효율성이라는 미명 아래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가 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노인들이 시대에 뒤처지지 않게 따로 공부해야 한다’는 개인의 노력만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기술의 발전이 특정 세대와 특정 언어 사용자에게만 축복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일상의 재앙이 된다면 그것은 결코 진정한 의미의 진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기술이 사람의 속도와 언어에 맞추는 ‘따뜻한 혁신’입니다. 미주 한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시니어 맞춤형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을 체계화하는 것은 물론, 공공장소의 기기들이 한국어를 포함한 다국어 지원과 직관적인 설계를 갖추도록 주 정부와 기업에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나아가 기업들은 고령자의 신체적 제약과 인지적 특성을 반영한 ‘포용적 기술(Inclusive Tech)’을 단순한 옵션이 아닌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의 핵심 요소로 삼아야 합니다.
기술의 본질은 결국 인간과 인간 사이를 잇고, 소외된 이들을 다시 세상의 중심으로 끌어내는 가교가 되어야 합니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눈부시게 발전하여 인간의 고도화된 업무를 대신한다 해도, 그 과정에서 우리 곁의 이웃을 배제하고 뒤처지게 만든다면 그것은 영혼 없는 기계의 질주에 불과합니다.
척박한 미국 땅에 ‘한인 사회’라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청춘의 열정을 다 바쳤던 우리의 부모님들이 디지털이라는 낯선 타국에서 다시는 길을 잃지 않도록, 이제는 한인 사회와 기술 기업들이 함께 응답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에 진정으로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는가?"라는 이 무거운 질문에 당당히 답할 수 있을 때, 기술은 비로소 모든 세대를 품는 진정한 인간적 온기가 될 것입니다.
- 글쓴이 LaVie
- 전 금성출판사 지점장
- 전 중앙일보 국장
- 전 원더풀 헬스라이프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