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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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끼 그 이상의 의미

에세이
작성자
KReporter3
작성일
2022-10-10 18:27
조회
280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먼저 코로나바이러스 19가 전 세계적으로 높은 사망률과 짧은 시간에 빠르게 퍼져나가던 그때 일들을 다시 상기해야 했다.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코로나19는 동네 멍멍이도 알 정도로  여전하지만 조심스럽게 우리 일상은 재조정되었고, 삶의 테두리는 봄에 싹을 틔우는 나무처럼 한아름 굵어져 조금씩 확장되었고, 더위속에서 하늘을 향해 내어 뻗은 나뭇잎처럼 일상은 생기를 찾아갔다. 그렇게 우리는 위기를 살아냈고, 그럭저럭 잘 견뎌내었고, 이제 끝이 멀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일상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잠깐이면 될 줄 알았는데, 너무 많은 것들이 무너졌다. 육신이라는 집이, 가족이, 마음이라는 집이 무너져서 회복하려면 어쩌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도 다르지는 않았다. 아니, 우리 가족은 코로나19 이전에도 자발적 집콕인 날들을 일찍 시작해서 그런지 코로나19 초기에 거리두기 강화로 아이들 등교가 중지되면서 시작된  큰아이의 온라인 수업 적응 말고는 크게 변화를 못 느끼다가 거리두기 단계가 높아지고, 마스크 대란에 확진자가 매일 갱신되면서 이 역병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게 되었고 확진자가 생활 반경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콩알만큼 줄어드는 기분을 매일 느꼈다.

다행히 1년 뒤, 시골의 작은 학교로 전학을 온 덕분에 큰 아이는 한 학년을 빠짐없이 잘 다녔고 코로나19와 함께 2번째 겨울방학을 맞이했다.

50여 일이 넘는 긴 겨울방학. 날은 춥고, 갈 곳은 극히 협소한, 하루 확진자 십만 명대는 우습지도 않았던 역병이 창궐하는 흉흉했던 시기의 겨울방학.

그나마 집이 가장 안전했지만, 나는 나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슬기로운 방학생활을 위한  준비가 시급했었다.




내가 할 일이란 '밥때'가 되었을 때 '제대로 된 한 끼를 잘 챙겨 먹이는 것' 일 뿐인데 살면서 이보다 더 큰 시련과 고통도 겪어본 것 같은데, 새삼 삼시 세 끼가 현실로 닥치면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게 느껴진다.

아기였을 적에는 이것저것 나름 골고루(하지만 적게) 먹었던 것 같은데 갈수록 편식도 심해지고 입맛이 까다로워진 내 아이. 매일 '오늘은 뭐 먹어요?' 말밖에 모르는 사춘기가 시작된 아이.

아이의 방학 시작= '무얼 먹을까' 고민 시작

대부분의 엄마들이 공감할 방학 공식.

학기 중에는 급식을 먹어서 그나마 부담이 덜했던 것이 영양사가 아이들 성장에 오죽 잘 맞게 영양식(이라고 믿고 싶은 엄마 마음)으로 준비해주었을까. 그 한 끼만큼은 (내 마음이) 든든했는데(그런 의미로 무상급식에 무한감사). 그런 마음에서인지 방학 동안 그와 비슷한 영양식을 공급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부담감을 지워낼 수 없었다. 지난여름 방학들도 고비였지만, 계절에 맞는 면 요리에 단백질을 추가하는 식으로 했었고, 무엇보다 기간이 짧아서 해볼 만했었다. 그러나 겨울방학은 무려 50일이다.

도대체 50일 동안 뭘 해 먹고살아야 되나, 마음 저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진심이 담긴 말, '이놈의 지겨운 밥'.

그렇게 한숨으로 며칠을 고민했다.




'뭘 해 먹을까'

결국 모든 이들이 매일 겪는 공통의 난제이다. 우리네 엄마 시절에 비한다면, 아니 먹고살기 힘들었다던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한다면 '어떤 맛있는 걸 먹어야 할까'에 가까운  행복에 겨운 고민이지만, 시대가 변했어도 무엇이든 '해야' 먹을 수 있는 '노동력'과 직결되기 때문에 이 문제가 여전히 힘들고 복잡한 것 아닐까.

물론 요즈음에는 워낙 먹을 것들도 많고, 맛있는 것도 많고 맛집도 많아서 선택의 폭은 넓어졌다.

TV 속 요리 프로그램이나 유튜브 채널을 보면 친절하게 요리과정을 설명해주는데, 여건이 되면(예를 들어, 밑 작업이 다 된 재료들이랄지, 정확하게 계량되어 준비된 모든 양념들이랄지, 3개 화구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게 돕는  손길과 바로바로 설거지해주는 도우미 등등.) 양념 방울 흔적 하나 없는 말끔한 앞치마를 입고 웃으며  '참 쉽죠?' 하며 다양한 반찬과 요리들을 뚝딱 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주말에 몇 가지  밑반찬을 만들어 놓으면 한 주가 한결 편해질 수 있고 (현실은 동네에 괜찮은 반찬가게, 여의치 않으면 마트 레트로트 반찬에 의존하게 되는)

또 밀 키트(조리 직전 단계 간편식)라는  재료 준비 과정을 단축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신박한 효자 아이템도 있으니 이 얼마나 세상 편한가.(물론 적어도 요리 좀 해봤다 하는 사람들은  '이 돈 주고 이럴 거면 차라니 내가 해 먹겠네'하는 가성비가 아쉬운 면은 있지만 일 년에 한 번쯤이라면 쓰고 싶은 비장의 무기.)

그것뿐인가. 직접 요리하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배달의 민족이 있다. 다양하고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손가락 몇 번 까딱해서 따뜻한 상태에서 편하게 먹을 수도 있다. (물론 코로나19 사태 이후 배달비용-띠용-을 따로 지불해야 하고 무엇보다 먹은 것에 비해 쏟아지듯 많은 일회용기 폭탄을 맞이하게 된다.)

확실히 우리 엄마 세대에 비해 편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편해진 만큼 분명 생략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결국

편해지고 선택의 폭은 넓어졌지만, 이제 먹는 '일'은  포만감만 채우면 끝이 아니라, '무엇을 누구와 어떻게 어디에서 먹었느냐'로 시작해서 '잘 먹었다'라는 만족감을 느낌으로써 그날 하루의 컨디션, 기분, 일상을 좌우하기도 하는, 복잡하고 중요한 일종의 '의식'이 되었다. 어떤 이에게 한 끼 식사가 관계의 소통이 될 수도 있고, 정보가 될 수 있고, 이윤을 남기는 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을 보면  '먹는 일'은 먹고 끝날 일이 아니라 먹고 무엇을 남기는 일이 되었다.

다시 코로나19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코로나19의 발발은 남의 나라, 남의 일이라고만 여겼던(SARS, 에볼라, 메르스는 정말 남의 일만 같았다) 전염병이, 지금 나와 내 가족에게 닥친 생존과 직결된 현실이었고,  방역수칙 준수는 물론, 개인 위생과 면역력에 관심을 기울이게 해 주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건강을 신경 쓰게 되면서 나 역시 인터넷에서 '면역력'에 관련해 이것저것 검색을 해봤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기본적인 신체 방어 시스템이 잘 작동하려면, 적당한 운동과 쉼, 비타민이나 영양제 섭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건강한 식재료로 '잘 만든 음식'을 '잘 먹는 것'에 눈길이 갔다. 물로 100세, 120세 무병장수가 꿈은 아니지만, 내가 건강해야 가족도 가정도 지킬 수 있음을 깨닫게 된지라 건강한 음식을 먹고 건강하게 살아남아 유종의 미를 거두자고 나를 다독였다.




누군가 해주던 밥만 먹던 시절에는 몰랐다.  이 '먹고사는 일'이 이렇게 힘든지를.

'밥 있고 반찬 있고, 더해서 국 있으면 되는 일인데, 왜 고민하지?'라는 철없던 말을 내뱉던 과거의 나.

이제 누군가를 '먹여 살리는 사람'이 되어 보니, 그까짓 밥 차리는 일을 매일 해야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겠더랬다.

앞으로도 몇십 년을 반복해야 하는데, 살림(살리는 사람)으로써, 엄마로서의 사명감으로 어떻게 매일을 비장하게 살 수 있겠는가. 때 되면 찾아오는  한 끼를 차려내는 이 일에 '수고로움'말고  다른 의미를 부여해주고 싶었다. 모름지기 어떤 일을 시작할 때, 크던 작던 소위 말하는 '대의명분'이 있어야 동기부여가 되고, '일(직업)'로써의 책임감이 생기게 되지 않던가(나는 의미부여를 좋아하고, 의미가 있어야 움직이는 사람이다).

어떤 '대의'와'명분'의 프레임을 씌워야 적당 할까를 고민하다 아이들에게 해준 음식들의 레시피를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 밥이 그리워'라는 말보다 '엄마가 해준 것처럼 잘해서 먹었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요리책을 만들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직 나만의 요리 꿀팁 이런 것은 없지만(요리에도 왕도가 없다는 깨달음이 꿀팁이라면 꿀팁)

1. 정량, 2. 정성, 3. 정리라는 나만의 원칙과 조금 비싸더라도 유기농 재료를 필요한 만큼만(대량 구매, 1+1 사절) 사서 먹는 것에 죄책감을 갖지 말 것, 제철에 나는 식재료(과일, 야채, 생선 등등)를 활용하되 생선은 활어보다는 잡아서 바로 급속 냉동한 것으로 살 것 등등.. 나름의 소신을 담아, 레시피를 선정하게 된 배경이나 그 음식에 관련한 추억을 담아 이야기를 풀어갈 예정이다.

물론 레시피에는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는 식자재도 있다. 다양한 식재료를 맛보고 더 새롭고 다양한 음식에 관심을 갖고 궁극적으로는 그 요리를 먹게 하는 것이 이 요리책의 목적이다. 세상은 넓고 또 맛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우리에게 익숙한 한식, 중식, 일식, 양식의 메뉴들을 내 아이들이 집에서 해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을 기초로 먹어본 놈이 먹을 줄 안다고, 더 넓은 세상, 새로운 음식에 두려움 없이 도전하고 그 맛을 알아 간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그래서 사랑하는 누군가와  그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추억을 쌓아가고, 누군가에게 그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생각만 해도 두근거린다.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단절과 고통과 슬픔을 주었지만, 돌이켜보니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주었고, 매일 반복되는 한 끼지만 시선을 돌려 나와 가족의 건강을 돌아보고 돌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한 끼 그 이상의 의미를 담아낼  '아들에게 주고 싶은 스토리 푸드 레시피'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 에세이는 브런치 작가 Eunjung Kim 님이 제공해주셨습니다. (brunch.co.kr/@keepgrowing)

Eunjung Kim 님의 '아들에게 주고 싶은 스토리 푸드 레시피'가 레시피 게시판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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