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시

케이시애틀 연재 에세이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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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여름

에세이
작성자
KReporter3
작성일
2022-11-17 20:05
조회
224

시애틀로 간 백미와 현미 (11화 - 마지막 화)

 

무화과의 계절은 가을이 아닌 여름이다.라고 생각했다. 한여름에 백미와 현미의 이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고, 이제 제법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이 장의 제목은 무화과 향이 나던 여름에 써 놓은 것인데, 가을에 접어드는 지금 산책길에 무화과가 익어가고 있다. 친구들이 육지에 간 동안 강아지들을 돌봐주기로 해서 이웃 마을에 아침, 저녁으로 가고 있는데, 길가에 무화과나무가 무성하고, 열매가 제법 영글어 가지가 처지기 시작했다. 여름 무더위 속에 존재감을 자랑하던 향기가 단단하게 과실이 되었구나 생각했다. 그러니 무화과의 계절은 가을이 아니라고 했던 말은 너무 성급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을이 오고 있고, 두 달 뒤면 우리는 이 집을 떠난다. 처음부터 보리와 함께 살고, 아이비가 다녀가고, 백미와 현미가 머물던 집. 이 집에서 지낸 계절의 기억이 두 바퀴를 돌아 다시 과실의 계절을 만난다. 한여름에 이사를 와서 세 번째 가을을 보내고 떠난다. 우리가 이사를 할 계절은 아이비가 임신한 걸 알고 발을 동동 구르던 계절, 백미와 현미를 데려와 추위가 시작되는데 임보처를 찾지 못해 마음이 조급하던 계절이다. 아이비의 새끼들이 자라는 모습을 볼 때는 행복했고, 마음이 아팠다. 백미와 현미를 데려왔을 땐 다행이었고, 추위가 늦게 오기를 바랐다. 돌아오는 계절은 어떠려나. 그런데 당장 집을 구해야 하는 내 사정보다 어미개와 새끼 여섯 마리를 구조한 아는 이의 사정에 자꾸 더 마음이 쓰인다. 우선 어미개를 임보 하기로 한 이도 아는 사람이기에 어제부터 그 이에게 준비할 것을 알려주고, 그동안 정리하기를 계속 미뤘던 ‘써 봐서 좋았던 것들’ 정리도 해봤다. 꼭 필요한 물품들과 내가 써 봤을 때 좋았던 물품들. 백미와 현미가 있을 때 마음만큼 잘해 주지 못했는데, 또 다른 강아지가 임보 가족을 만나 지내게 된다니 그 기간이 얼마나 될지는 몰라도 내가 백미, 현미랑 지냈을 때보다는 더 잘 준비해서 좋은 임시 보호자가 되길 바라며 열심히 정리를 했다.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한 번 정리를 해 놨으니 나에게도, 그에게도 혹 그 내용을 보게 될 다른 이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개들을 임보 하거나 입양한다고 생각할 때, 내 경우는 경제적인 부분이 가장 고민이었기에 남들에게도 경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뭐든 나한테 너무 무리가 되지 않는 만큼 하는 것이 나와 주변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백미, 현미와 함께 지냈던 시간. 사진에는 행복한 순간들만 남아있고, 지금 돌이켜 생각해 봐도 별로 힘들지 않았다고 할 만큼 즐겁고 충만했던 것 같지만 그 시기를 행복하게 잘 보내기 위해서 우리도 서로 많이 노력했다. 두 사람이 서로 피곤하고 힘들다는 걸 알기에 서로 배려하고, 집도 더 잘 정리하려고 애썼다. 대형 크레이트 두 개가 들어간 거실은 개들 차지가 되었고, 밥은 조용히 먹으려고 테이블을 옮겨 놓은 방까지 곧 개들과 함께 쉬는 공간이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같이 쉬는 시간이 좋았다. 긴 겨울밤이 매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금방 지나갔지만 강아지들과 골방에 누워있으면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는 제주에 가서 사는 동안 뭘 했느냐고, 그러려고 제주에 갔느냐고 묻고, 사실은 나도 그 생각 때문에 늘 괴로웠지만 내가 한 일을 내가 인정해 주지 않으면 누가 인정해 줄 수 있을까. 남들이 아무리 대단한 일을 했다고 해도, 백미와 현미의 형제들을 다 구하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지금도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개들, 고양이들 동물들에 대한 생각에 나를 충분히 칭찬해 주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그 일을 가치 있는 일로 인정해 줘야만 앞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개들을 다 구할 수도 없고, 동물을 구조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면서도 구조에 나선 이들을 돕지도 못하지만.

 

여전히 그렇다. 늘 그랬다. 이렇게 글이나 적고 있을게 아니라 나가서 개 산책을 한 번 더 시켜주고, 밥을 챙겨줘야 한다고.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가도 옆집에 개를 보러 갔다. 어쩌면 이 글은 아이비와 보리를 만난 순간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2019년 봄부터 2022년 봄까지 3년 동안의 여정을 가을이 되어 정리를 한다. 그 기간 동안 나는 글도 쓰고 싶었고, 개들을 구하고 싶었고, 돈도 벌고 싶었다. 셋 다 해야 했는데 내 능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지난 시간은 내 부족함을 깨달은 시간이었다. 비교는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고, SNS도 정신건강에 도움이 안 된다고 하지만, 늘 남들은 더 많은 개를 구조하고, 입양도 잘 보내는 것 같아서 부럽고, 나는 왜 그렇게 안 되는지 자책했다. 누군가는 경제적 여유도 있고 집도 넓어서 더 많은 개들을 보살피면서도 덜 힘든 것 같아서 부러웠다. SNS에는 홍보의 귀재들도 많았다. 새로운 견생을 찾은 개들은 행복해 보이는데, 한편으로는 도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개들도 많았다. 그 간극이 힘들었다. 나에게도 관심이 필요했는데, 관심을 요구하는 내가 이기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무엇 하나에도 집중을 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시간이 흘러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 주변에서는 보리와 무무에게 좋은 가족을 찾아줬으니 할 일을 했다고 말해줬지만 나는 그런 칭찬의 말들을 듣기가 너무 슬펐다. 내가 살기 위해 다시 개들을 구하려는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괴로운 마음으로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서.

 

내가 좀 더 욕심이 많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백미와 현미의 다른 형제들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여전히 한다. 그래도 백미와 현미가 시애틀에서 잘 살고 있는 모습은 그런 나의 탓하는 마음을 조금 달래준다. 이 정도라도, 이렇게라도 해냈다고. 나를 다독거릴 수 있게, 애썼다고 말해 줄 수 있게 해 준다.

 

여전히, 내 방 창문 밖 이웃집의 강아지는 우는 날이 많다. 아주 어릴 때 그곳에 와서 몇 번인가는 식구들이 밭에 가는 날 따라가기도 했었는데, 더 크고 나서는 털이 날린다고, 똥을 싼다고 구박을 받는 모습을 종종 본다. 야단을 맞을 때가 아니면 늘 외롭게 혼자 있을 뿐이다. 식구들이 오면 알아봐 달라고 짖지만 말을 거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할머니는 개가 귀찮은데 할아버지가 좋아하신다고 한다. 고기도 많이 주는데 말을 안 듣는다고, 빗자루를 들고 야단을 친다. 그 아이가 다닐 때면 촤르르르르르륵 무거운 쇠줄이 끌리는 소리가 난다. 정말 예쁜 강아지였다. 드물게 예쁘게 생겨서 금방이라도 다른 입양 가족을 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만큼 귀여웠다. 할머니가 열 마리의 새끼들 중에 가장 큰 녀석을 골라 왔다고 했다. 자라기도 예쁘게 자랐다. 크기도 크지 않고, 수컷인데도 얼굴이 갸름하고 아기 때 얼굴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 강아지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다. 담 너머로 간식을 줬었는데, 내 기척을 너무 심하게 의식하는 것 같아 더 이상 줄 수가 없었다. 여름 내내 불안했다. 혹시 할머니가 귀찮다고 팔아버릴까 싶어서. 그래도 어디 팔 생각이시면 제게 파시라는 말을 못 했다. 말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여러 번 말을 골라봤지만 결국 한 번도 내뱉지 못했다.

 

우리는 곧 10평짜리 아주 작은 원룸으로 이사를 간다. 이웃집에서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는 언니 오빠가 새끼 고양이를 tnr 보내기 전에 입양하라고 꼬셨지만 차마 데려오지 못했다. 강아지를 잠시 맡아주는 단기 임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리적인 핑계가 생겨 다행이라는 생각도 한다. 이제 개 말고, 내 인생에 집중할 때라는 생각. 그런데 대체 어려움에 빠진 생명을 외면하면서 챙겨야 할 내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여전히 말이 막힌다.


 

이 에세이는 배우 서기 님이 제공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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