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게시판

불교와 기독교의 허구와 진실(중요)

작성자
새사람
작성일
2014-09-03 06:49
조회
494

불교의 근본사상은 해탈(解脫)이요 기독교의 근본사상은 부활이라 말합니다. 그러면 해탈과 부활은 어떻게 다른가? 계란에서 부화(孵化)되어 나오는 병아리를 보고 불교인들은 해탈되었다고 말하고 기독교인들은 부활이 되었다고 말을 한다 해도 그 의미나 상황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탈이나 부활은 용어만 다르지 모두 동일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시대 신(是大神)을 불교인들이 반야(般若)라 부르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라 부른다 해서 유일신이 두 신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불교와 기독교는 유일하신 시대 신(是大神)을 각기 자기들의 신(神)이라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시대 신(是大神)을 기독교에서 하나님이라 말하는 것은 신(神)은 오직 한 분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신은 오직 시대 신(是大神)한 분뿐이시며 다른 신들은 잡신들입니다. 단지 시대신(是大神)을 부처님은 반야(般若)라 말씀하신 것이며 예수님은 하나님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불교는 자비(慈悲)의 종교이며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 말합니다. 이렇게 자비는 불교의 독점물이 되었고 사랑은 기독교의 전매특허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불자들은 부처님의 자비(慈悲)가 불교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기독교인들 역시 예수님의 사랑도 기독교만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둠을 비추는 태양이 지구의 모든 곳을 고루 비춰주듯이 부처님의 자비와 예수님의 사랑은 용어만 다를 뿐 무명(無明)가운데서 죽어가는 중생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반야의 빛이며 생명입니다. 반야(般若)께서 인간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넓습니다. 반야의 사랑은 모두의 것이며 어느 특정한 종교나 특별히 한정된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반야의 사랑은 자비라는 이름으로 불교의 소유물이 되어버렸고 반야(般若)의 자비(慈悲)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의 소유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자비(慈悲)라는 불교 안에는 진정한 자비가 없고 사랑이라는 기독교 안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자비는 부처님 안에만 있고 참사랑은 예수님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진정한 자비나 사랑은 오늘날 해탈된 부처님이나 부활된 예수님 안에만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불교 안에는 산부처님이 없고, 기독교 안에는 살아있는 예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교인들은 지금도 다시 오실 미륵불(彌勒佛)을 기다리고 있으며 기독교인들은 구름타고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늘날 불교 안에 살아계신 부처님이 계시고, 기독교 안에 살아있는 예수님이 계신다면 무엇 때문에 불자들은 미륵불(彌勒佛)을 기다리며, 무엇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구름타고 오시는 재림예수를 기다린단 말입니까? 불교가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기독교는 예수님의 형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는 것은 오늘날 불교 안에 생불(生佛)이 없고, 기독교 안에 산 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산부처가 없고 살아있는 예수가 없다면 어느 누가 해탈을 시키고 부활은 누가 시킨단 말입니까? 오늘날 스님들이 해탈을 시키고 목사님들이 부활을 시킨단 말입니까?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불자들을 해탈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반야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부처님이시며 기독교인들을 부활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신 예수님뿐입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불자들이 해탈이 되지 않는 것이며 기독교인들은 부활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불자들은 누가 해탈을 시키며 기독교인들은 어느 누가 부활을 시킨단 말입니까? 그러나 염려할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불교나 기독교 안에는 없지만 불교나 기독교 밖에는 항상 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중생들이 불교와 기독교의 틀 속에 갇혀있고 또한 욕심과 탐심(貪心)때문에 눈이 멀어 오늘날 살아계신 부처나 예수를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나 기독교가 해탈이 되고 부활이 되려면 하루속히 교리의 틀에서 벗어나 오류없는 진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살아계신 부처님을 만날 수 있고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반야(般若)로부터 오신 현생의 부처를 만나서 그를 믿고 따른다면 해탈이 되고 부활이 될 것입니다. 죽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부처면 어떻고 예수면 어떻습니까?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진정한 부처이며 예수가 아닙니까? 부처님의 자비는 죽은 영혼을 구원하여 영원한 반야(般若)의 생명을 주는 것이 진정한 자비이며 예수님의 사랑 역시 죽은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스님들이나 목사님들이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여 살리지 못한다면 불교는 자비의 종교요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 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것이 곧 부처님의 자비요 예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는 부처님의 자비를 찾아 볼 수 없고 기독교 안에는 사랑이 메말라 버렸습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자비와 예수님의 사랑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불교인들은 자비가 불경 속에 있다는 생각으로 불경을 열심히 보고 기독교인들은 사랑이 성경 속에 있다는 생각으로 날마다 성경을 읽고 있지만 경속에서도 자비와 사랑은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중생들안에 있는 욕심, 즉 탐, 진, 치(貪, 瞋, 癡) 때문에 마음은 화인(火印)을 맞았고 눈은 탐욕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무명의 중생들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지금도 방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불자들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육바라밀을 통해서 천상(天上)으로 가는 길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윤회(輪廻)에서 벗어나 부처가 되려면 먼저 지옥계에서 나와야 합니다. 지옥계(地獄界)에서 보시행(布施行)을 통해서 아귀계(餓鬼界)로 나온 자들은 부처님의 계율을 지키고 행하여 축생계(畜生界)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육바라밀(六波羅蜜)의 과정을 통해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 천상계(天上界)에 이르러야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자재보살이 된 부처는 반드시 이타(利他)를 행하여 보리살타 부처님이 되고 다시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천상으로 가는 육바라밀(六波羅蜜)의 길을 불자들이 지금까지 몰라서 등한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출간된 금강경(金剛經)해설서가 진리의 등불이 되어 불자들의 갈 길과 이생에서 해야 할 일들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불자들은 이 해설서를 통해서 부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육바라밀(六波羅蜜)을 통해서 모두가 해탈이 되어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오늘날 불자들에게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금강경의 깊은 뜻을 이렇게 자세히 드러내어 보여주신 것은 무명(無明)의 중생들이 하루속히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윤회(輪廻)에서 벗어나 부처가 되라는 마음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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