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을 깨자!
작성자
오 바울
작성일
2008-01-15 17:02
조회
1212
“틀을 깨자”
--1-15-2008- 아침 묵상-
성경; 누가복음5장17-26
세상은 안정을 원하면서도 변화를 갈망합니다.
어떠한 틀은 안정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필요하지만 또한 그 틀은 깨지지 않으면 변화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다한 병든 무리들을 고치시면서 지속적으로 말씀을 전하시는 것은 안정가운데 변화를 추구하시는 인간들의 삶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건은 그 유명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입니다.
이 본문은 본인의 믿음뿐만 아니라 중풍병자를 들고 온 그 4명의 친구들의 믿음을 통한 구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성경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의 시작(17절)을 보면서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 생각이 바뀌면서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평범한 무리들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모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이란 말을 읽으면서 그 범위가
마치 사도행전 1장8절에서 전도의 대상을 말씀 하실 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 되라고 하신 대상과 흡사할 정도로
그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에서는 다 왔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사역에서 무언가 시비 거리를 발견해서 그것을 빌미로
잡아갈 작정으로 예수님을 반대하는 모든 무리의 총수들이 다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는 은혜로운 자리보다는 살벌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은 그런 정막한 자리를 깨뜨리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지붕으로 올라가 진흙과 지푸라기를 걷어내고 구멍을 내고 자기 친구인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 논 것입니다.
한번 상상을 해 보십시요!
얼마나 그 분위기가 황당했을까 짐작이 갈 것입니다.
평범한 복장이 아니라 종교색이 짙은 눈에 띄는 옷들을 입고 앉아 있는 많은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의 주는 분위기는 매우 엄숙하고 정막이 감돌았을 것입니다.
한층 딱딱한 분위기에서 머리 위 지붕의 구멍이 뚫리며 사람이 들것에 실려 내려오는 그 광경을 ...
왜 우리에게 무엇을 생각하게 위해서 누가복음은 적고 있을까요?
단순히 친구들의 믿음에 의해서 병이 고치지고 그 믿음을 본받으라고 하시기 위해서만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건을 통해서 형식에 잡혀있는 사람들에게 그 틀을 깨어야 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죄 사함에 대한 그들에 갖고 있는 틀을 깨고 그것을 위해서 오신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아직도 깨어지지 않고 있는 틀 때문에
죄 사함을 받은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자신을 발견해야 되지 않을까요?
나만이 정통이란 틀을 버리시고 나한테 모든 것을 맞추라는 틀을 깨시고 상대방한테 한번 틀을 맞추어 보십시요!
그러면 또 다른 모습의 구원의 삶의 넓이와 깊이와 길이와 높이가 충만하여지실 것을 확신합니다!
---씨애틀 새 생명 교회를 섬기는 작은 종 오 바울 --
--1-15-2008- 아침 묵상-
성경; 누가복음5장17-26
세상은 안정을 원하면서도 변화를 갈망합니다.
어떠한 틀은 안정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필요하지만 또한 그 틀은 깨지지 않으면 변화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다한 병든 무리들을 고치시면서 지속적으로 말씀을 전하시는 것은 안정가운데 변화를 추구하시는 인간들의 삶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건은 그 유명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입니다.
이 본문은 본인의 믿음뿐만 아니라 중풍병자를 들고 온 그 4명의 친구들의 믿음을 통한 구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성경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의 시작(17절)을 보면서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 생각이 바뀌면서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평범한 무리들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모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이란 말을 읽으면서 그 범위가
마치 사도행전 1장8절에서 전도의 대상을 말씀 하실 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 되라고 하신 대상과 흡사할 정도로
그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에서는 다 왔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사역에서 무언가 시비 거리를 발견해서 그것을 빌미로
잡아갈 작정으로 예수님을 반대하는 모든 무리의 총수들이 다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는 은혜로운 자리보다는 살벌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은 그런 정막한 자리를 깨뜨리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지붕으로 올라가 진흙과 지푸라기를 걷어내고 구멍을 내고 자기 친구인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 논 것입니다.
한번 상상을 해 보십시요!
얼마나 그 분위기가 황당했을까 짐작이 갈 것입니다.
평범한 복장이 아니라 종교색이 짙은 눈에 띄는 옷들을 입고 앉아 있는 많은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의 주는 분위기는 매우 엄숙하고 정막이 감돌았을 것입니다.
한층 딱딱한 분위기에서 머리 위 지붕의 구멍이 뚫리며 사람이 들것에 실려 내려오는 그 광경을 ...
왜 우리에게 무엇을 생각하게 위해서 누가복음은 적고 있을까요?
단순히 친구들의 믿음에 의해서 병이 고치지고 그 믿음을 본받으라고 하시기 위해서만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건을 통해서 형식에 잡혀있는 사람들에게 그 틀을 깨어야 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죄 사함에 대한 그들에 갖고 있는 틀을 깨고 그것을 위해서 오신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아직도 깨어지지 않고 있는 틀 때문에
죄 사함을 받은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자신을 발견해야 되지 않을까요?
나만이 정통이란 틀을 버리시고 나한테 모든 것을 맞추라는 틀을 깨시고 상대방한테 한번 틀을 맞추어 보십시요!
그러면 또 다른 모습의 구원의 삶의 넓이와 깊이와 길이와 높이가 충만하여지실 것을 확신합니다!
---씨애틀 새 생명 교회를 섬기는 작은 종 오 바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