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세상의 모든 아들들아

작성자
KReporter3
작성일
2022-10-24 08:45
조회
180

빅 피쉬


대부분의 아들이 그렇듯 나도 아버지가 만든 세계에서 살아왔다. 마녀가 사는 것도, 거인이 사는 것도, 인어가 사는 것도, 늑대인간이 사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곳은 내게 언제나 낯섦으로 인식됐다. 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하기 힘든 태생적 한계 때문이었을까. 아들은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아직은 권력적으로 서열이 정해지는 탓에, 가족이라는 무대, 특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여전히도 야만성이 존재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로 여겨진다. 치고받는 행위만 없을 뿐, 이 포인트는 철저히 우열성이 존재한다.

아들은 울지 않는다. 단순하게 남자는 울지 않는다로 귀결될 문제는 아니다. 태어남과 동시에 태산처럼 느껴지는 상대가 시간이 지날수록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만큼 애석한 일은 없다. 그래서 눈물 따윈 흘리지 않는다. 마치 오랜 시간 무예를 연마한 격투가가 다운된 상대로 보고 손을 뻗지 않는 것처럼 지극히 이성적인 행동이다. 상대에 대한 매너는 이렇게 발동한다. 아버지의 삶이 임종에 다가가더라도 울지 않는 이유는 아마 동정심 때문일 거다. 평생을 마주하여 그 그림자를 뜷어낸, 또 다른 태산이 될 남자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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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빅 피쉬에서의 윌 블룸은 인생이 거의 끝나가는, 종막에 다다른 에드워드 블룸에게 어떤 말로도 상대가 되질 않는다. 어쩌다 대화라도 한다 치면 황급히 자리를 떠나기 일쑤다. 이 부분에선 아버지와 아들의 우열성이 아들에게 완전 열한 상태로 끝난 것이다. 아버지인 에드워드 블룸은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뛰어난 말솜씨를 지니고 있으며 아들인 윌 블룸은 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함에도 이 싸움에서 절대 이길 수 없다. 아버지가 계속 태산같이 존재하고 있으니 아들의 입장에선 비아냥거리거나 답답함을 토로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수밖엔.

그래서 아들의 열등함은 아버지의 삶을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단순한 구조로 전개되는데, 그것인 즉 에드워드 블룸이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단일한 플롯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의 부정은 영화의 가장 주요한 갈등이 된다. 다소 허무맹랑한 듯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신뢰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보기 어렵다. 옆에서 통조림을 따주거나 이부자리를 고쳐주는 식의 휴전적 행위 말곤 아들은 아버지와의 싸움을 지속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무려 3년간이나 싸움을 멈춰두고선 여전히도 전투 의지를 발현하지 않는다.

어쩌면 윌 블룸은 끝까지, 마녀와 거인 그리고 기이한 서커스단을, 또 폭풍우에 잠겨버린 물속에서 나체 인어를 만났다고 떠들어 대는 아버지를 이겼다고, 저 양반의 허황된 이야기를 굳이 상대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했을 수도 있다. 태산을 넘지 못해 돌아가고 있음을 끝끝내 인정하지 못하는 건 허풍을 멈추지 않는 아버지 에드워드 블룸이 아닌, 아들 윌 블룸일 수 있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분명한 우열관계가 존재한다. 공생은 없다. 싸움 없인 정리되지 않는 원초적 관계, 빅 피쉬는 이것을 서로 간의 말로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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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초반부에는 윌 블룸과 에드워드 블룸의 다툼 장면이 있다. 허풍을 거듭하는 아버지가 못마땅한 아들은 그에게 직언을 날린다. 그런 이야기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으니 제발 그만하시라고. 그날의 사건 이후, 그들은 3년간 말하지 않았다. 영화가 에드워드 블룸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동안 아들은 아버지의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뿐, 임종을 앞둔 아버지에겐 살가운 말을 건네지 않는다. 아버지가 아프기 때문에 아버지의 집을 방문한 것임에도, 아버지의 말에 무시하는 듯한 감정을 싣거나, 그 얘긴 이전에도 몇 번이나 들었다고 핀잔을 주는 정도다.

어린 시절의 윌 블룸은, 그러니까 아버지에 대항할 수 없는 시절의 윌 블룸은 에드워드 블룸의 허풍이 무척이나 재밌었을 거다. 영화 후반부에 나오듯 삶을 있는 그대로 전한다면 재미가 없기에, 어린아이가 혹할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버지의 목적이었으며, 이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보이는 아들의 모습이 평생토록 잊히지 않는다. 에드워드 블룸이 윌 블름을 대하는 자세다. 그리고 이건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기다림일 수도 있다.

아들은 자라고 아버지는 늙는다. 가장 완벽한 타이밍의 접점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윌 블름과 에드워드 블름 경우 이것이 거의 끝자락에 가서야 마주쳤다. 모든 게 거짓이라 판단하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조금씩 아버지를 이해하는 과정을 겪을 때야 비로소 아들인 윌 블룸은 느낄 수 있다. 애꾸눈 마녀의 눈이 왼쪽, 오른쪽 중 어디가 성한 지, 친구라고 소개한 거인의 키가 몇 센치미터인지, 물속에서 만난 인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실은 늑대였던 서커스단 단장이 어떤 이유로 그런 사연을 가진 건지, 사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을 즈음에서야, 그저 에드워드 블룸의 삶, 아버지의 삶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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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블룸은 자신이 허풍을 떠는 동안엔 거의 무에 가까운 표정을 짓는다. 그것은 영화 말미, 윌 블룸이 자신의 뒤를 이어 허풍을 하는 시점에 이르자 드디어 환한 웃음으로 바뀐다. 아버지와 아들이 다시금 말을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다시금 싸움을 한다. 이는 절대 치고받는 행위가 동반된 것이 아니다. 이들의 관계에선 이것이 우열성을 가리는 기준이다. 돌고 돌아서야 마침내 다시 전쟁이다. 그토록 오래도록 기다린, 본격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허풍 대결이다.

나의 경우도, 모두의 경우도 윌 블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임종을 앞둔 아버지의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나부터 열까지 사실을 따져봐야 할까. 이것에 대한 해답은 영화 빅 피쉬에 있다. 아들 스스로 아버지가 준 사랑에 보답하는 최적의 방법은 그를 닮아가는 거다. 윌 블룸과 에드워드 블룸의 허풍은 각각, 거대한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과 풀어줬다는 것으로 교체된다. 그리고 나서야 싸움이 끝난다. 패자의 뒷모습에 박수를 건네는 유일한 방법은 동정의 표시를 하지 않는 거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러하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아들들아, 아버지를 닮아가라. 그것이 유일한 마무리다.


 

이 영화 리뷰는 코치순 님이 제공해주셨습니다. (brunch.co.kr/@3000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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