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첫날의 단상
나의 7월의 새벽은 잠을 깨울 정도로 시끄러운 새들의 지저귐으로 시작됐습니다.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지원이의 얼굴을 만져보고, 잠자리에서 다리를 들어올리는 운동을 천천히 하고서, 조금 스트레치를 해 주고서야 일어났습니다. 그냥 확 일어나 버리기엔 이제 몸이 조금씩 투정을 하는, 그런 나이인가 봅니다.
찻물을 올려놓고, 냉수 마시고 나서 바깥으로 나가봅니다. 화단엔 장미가 활짝 피었습니다. 유난히 시끄럽게 지저귀는 저 새는 아마 뜸부기거나, 혹은 딱다구리일성 싶습니다. 자잘한 콩새들이 겁도 없이 제 머리 위에서 후드득거리며 날아다니는 걸 보니 아마 근처 어딘가에 둥지를 짓고 새살림을 차린 모양입니다. 알이, 우리의 2세가 근처에 있으니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는 뜻이겠지요. 이 새들의 조그맣고 예쁜 알을 보고 싶은데. 대략 짐작 가는 곳이 있긴 하지만 저렇게 신경쓰고 있는 부모의 입장을 봐서 참기로 했습니다. 대신 아기들이 태어나기만 하면 사진기를 들이대볼까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어느새 올해도 반 년이 이렇게 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7월의 새벽은 영 7월답지 않습니다. 조금은 서늘한 기운이 차 있는 이 7월의 아침, 세상은 반갑지 않은 뉴스로 가득 차 있군요. 하긴, 반가운 일들은 뉴스로 삼지 않으려는 뉴스매체들의 사디즘 탓이라면, 그것도 이야기가 될까요.
나날이 틴에이저를 향해-이미 몸은 틴에이저로 자라버린- 몸도 마음도 향하고 있는 우리 지호군은 어제 대형사고를 쳤습니다. 머리를 부분염색(이른바 블리치?) 하고 온 것이지요. 본인이 저렇게 원했으니, 개성 살려주는 것은 뭐 요즘 부모들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고, 실제로 저나 아내나 별로 이런 것을 충격스레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아마 이번 돌아오는 일요일에 성당에서는 아이들의 반응 - 아마 '쿨하다' 거나 혹은 '다른색으로 하지 그랬어' 등등의 반응이 올 듯 하고 - 과 어른들의 반응 - "저집애가 왜저런대" "부모가 어쩔려구 저렇게 놔뒀대" 등등이 될 듯한 -_-; - 이 상당히 엇갈릴 듯 합니다.
사실, 이런 저런 일들로 그 반년이 지나가고 다시 반년이 시작됩니다. 2010년도 참 역동적으로 지나가는군요. 그것이 좋은 의미이던, 나쁜 의미이던, 우리의 모든 종착역은 같을 것입니다. 우리 생명이 끝나는 바로 그날이 나의 삶의 종착역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저는 제 남은 생명에서 2010년으로 불리우는 한 해의 절반을 보냈습니다. 그게 그저 날려버린 것이 아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 해 보았습니다. 이것이 나만의 삶이라면, 삶은 허무할 뿐입니다. 그저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삶이라면, 내가 이렇게 고민하고 화두를 잡을 일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연대라는 이름으로 서로 연결되는 것이며, 또 '사회'라는 그물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보낸 이 6개월이, 우리 자식들이 앞으로 살아갈 6개월을 바꿀 수 있다면, 그리고 내가 연대하고 있는 이 사회의 전체 모습이 조금 나아지도록 바꿀 수 있다면, 지금 내가 보내는 시간들은 오히려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지금 나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식들의 삶을, 그리고 내 아내의, 부모님의, 그리고 나와 시대를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알고 나와 생각을 나누며 연대해 주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올해도 금방 가 버렸다고, 그렇게 또 6개월 후에 말하겠지요.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 충실하는 것으로서 나는 내 삶 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그이들 모두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이것은 지금 이 시간, 지금 이 공간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소망들 중 하나입니다.
시애틀에서...
권선생님의 7월은 목가적 분위기에서 열리는군요. 아침에 자욱한 새소리를 들으며 잠깰 수 있음은 축복입니다.
가까이에 새들이 있어준다는 것은 환경에 사람냄새가 그만큼 덜 난다는 것이고, 마음의 한 켠에 그 소리를 담아 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뜻도 되겠지요.
사람의 한 생애는 분명찌 단순하게 태어나 세상에 머물다가는 한 마리 소나 돼지와는 다른 의미라고 봅니다.
어항 속의 열대어가 아무리 꼬리를 흔들며 헤엄쳐도 어찌 어항을 밝혀주는 전기, 자기를 싣고 온 자동차, 멀리 길게 늘어 선 수평선, 넓은 하늘과 구름, 별 들을 이해는 커녕 짐작조차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생도 그와 같으리라... 가없는 우주의 건너편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백년을 넘기다보니 부쩍 비워야할 욕심, 관용 등의 단어가 새삼스러워집니다.
우연히 이 에세이를 읽으며 목가적 기운이 삶에도 연결되었으면 싶어 글을 보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