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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부재, 그리고 아들과 구워먹는 삼겹살

에세이
에세이
작성자
권종상
작성일
2016-02-17 07:53
조회
1822

사생미.jpg


 


 


"술 마셨어?"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엔 약간의 걱정이 담겨 있습니다.
"응, 지원이랑 고기 구워 먹고 있던 중이야. 왜 먼젓번에 먹고 남은 거 있지?"
"지호는?"
"여자친구랑 영화 보신댜."
"목소리가 어째 한잔 하신 목소리야.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아요."
"걱정 마셔."

소비뇽 블랑과 삼겹살은 그럭저럭 잘 갑니다. 원래 그 새콤함 때문에 샐러드와 잘 어울리는 것이 이 품종인데, 뉴질랜드 것을 제일로 칠 만 합니다. 그다음엔 프랑스의 르와르 밸리. 그리고 내가 사는 곳, 워싱턴 주의 콜럼비아 밸리 산도 부드러우면서 레몬의 느낌이 강한 소비뇽 블랑을 만들어 냅니다. 아내는 아직도 달콤한 리즐링이나 게부르츠트라미너를 선호하지만, 제가 확실히 좀 키워(?) 놓은 까닭에, 레드는 카버네 소비뇽이나 쁘띠 시라 같은 무거운 것들을 선호하고, 화이트 와인 역시 가벼운 것 보다는 무거운 느낌이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돼지고기는 참 다양한 음식에 잘 어울립니다. 삼겹살은 소주에 먹는 것이 정석이겠으나, 굳이 와인으로 따지자면 가볍거나 미디엄 느낌의 레드, 혹은 거의 모든 화이트 와인과도 어울립니다. 너무 가볍지만 않으면. 그래서 셰닌 블랑이나 토론테스 같은 매우 가벼운 느낌의 와인은 피해야 하고, 샤도네와 삼겹살은 궁합이 꽤 괜찮습니다. 레드라면 끼얀티 등 산지오베제 베이스의 와인이나, 혹은 피노느와도 괜찮고, 뭐, 너무 무겁지 않은 보르도 스타일의 와인이라도 좋지요. 

"암튼, 돌아오면 한 잔 같이 해. 그리고..." 
아내가 말을 딱 자릅니다. "취하셨구먼. 얼른 정리하고 자요. 굿나잇이예요."
"응, 사랑해."
"알라부 허니." 
우리 부부의 이 닭살스러움은 꽤 오래 간직해 오고 있는데, 죽을 때까지 가져갔으면 좋겠습니다. 

가끔 공상에 잠깁니다. 아내가 없는 빈 자리에서 공상을 하다 보면 내가 얼마나 쓸데없는 생각들로 시간을 보내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특히 말만한 사내 녀석들 둘을 끼고 있는 자리라면. 

언니의 병구완을 위해 뉴욕에 가 있는 아내가 언제 귀환하는지 성당의 자매님이 물어 오셨습니다. "우리 크리스티나가 없으니 형제님이 힘드시겠어요. 아들들 보느라 많이 힘드시죠?" 
제 대답은 그랬습니다. "아, '보는' 건 괜찮습니다. 이것들이 '안 보이는 곳'에 있을 때 걱정되죠." 
그 자매님의 대답은 그랬습니다. "말된다." 

지호는 발렌타인 데이 때 데이트를 한다고 차를 몰고 나갔습니다. "아빠, 무슨 일 있으면 전화 할께요."
제 대답은 그랬습니다. "야, 차라리 '무슨 일'이 생겨서 전화하는 거보다는 전화 안 왔으면 좋겠다."
그날 밤 지호가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아빠... 미안해요. 아임 소 쏘리.."
가슴이 덜컹했습니다. 이놈이 뭔 일이 났구나. 뭐부터 해야지? 보험사에 연락부터 해야 하나? 그러고 있는데 지호가 목소리를 쓰윽 바꿔 다시 말합니다. "아이 갓 츄.(나한테 당했어)" 

아, 가슴이 덜컥 했습니다. 이넘의 자식을 어떻게 혼내주지? 아빠를 이리 놀라게 하다니. 그러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카톡이 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지호가 이렇게 아빠를 놀렸다고 이야기하니 아내의 답이 가관입니다. "누구 아들인데." 아, 생각해보니 저도 저런 식으로 아내를 놀린 적이 많군요. ^^;

그녀의 빈 자리에서 그녀가 하던 일을 해 보니, 이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육개장은 매일 데워 놓고, 아내가 볶아놓고 간 도라지는 어제 다 먹었고, 애들 먹은 거 설겆이를 시켜도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해야 하고... 하긴 아이들에게 툴툴댈수도 없는 것이, 저도 겨우 결혼 하고 나서야 집안일이란 걸 들여다보기 시작했으니. 그런데 이걸 안 하면 결국 쌓이고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저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것 때문에 깜짝 놀랐는데, 의외로 심플하고 깔끔떨고 사는 게 좋더군요. 마음을 그리 먹으면 일이 많아지고, 그러다보면 머리에 잡생각들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아내의 일을 도와주지 않는 동안, 저는 아내가 공상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저희 어머니께 가져야 하는 죄책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역시 30년 넘게 교직에 봉직하시면서 저와 동생 둘의 도시락을 매일 싸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지금도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 아니면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고. "너희 아버지 밥 세 끼 해 드리는 것도 힘들어 죽겠다!"라고 하시는 어머니께서, 아이들을 데리고 따뜻한 밥 먹게 집에 올라와라 하십니다. 

부모님 댁은 그리 멀지 않습니다. 자동차로 20분 조금 넘게 걸리는 거리? 미국에서 그정도 거리면 거의 옆집임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한두번 뵙는 것이 전부. 그러나 어머니에게 갈 때마다, 어머니는 아직도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이것저것 차리십니다. 제가 아들이 아니라 이건... 어머니는 그래도 기쁘게 밥상을 챙겨 주시는데, 갈수록 이런 것들에 어떤 노동들이 들어가는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들이 많아지면서 저는 그저 죄송할 뿐입니다. 

아, 오늘 애들은 학교가 교사 컨퍼런스로 쉰다고 하는데, 이것들 어제 밤 늦게까지 게임하고 잔 것이 틀림없습니다. 얼른 깨워서 델구 올라가야 하겠습니다. 제 공상의 자유를 어머니 덕에 보장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다시 마음을 먹습니다. 아내에게도 공상의 자유를 허해야 하겠다고. 그것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사랑의 증거라고.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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