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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온 지 22년 되는 날의 단상

에세이
에세이
작성자
권종상
작성일
2012-03-23 11:18
조회
4566

4월이 다 됐건만, 이른 아침을 엄습하는 한기는 아직 가시지 않았습니다. 화단엔 히야신스 꽃들의 봉오리가 자리를 다 잡았고 이제 활짝 필 때만을 기다리고 있건만, 그래도 아침 저녁으로는 추위를 막을 두꺼운 옷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바깥에 세워 놓은 아내의 차엔 성에가 끼어 있습니다. 봄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어색한 이 차가움은, 햇살이 와서 닿는 순간에 언제 그랬냐는 듯 황급히 물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햇님이 서쪽 하늘로 넘어가고 나면 다시 엄습해 들어올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런 때를 환절기라고 부르지요. 감기 조심하세요.

 

3월 23일. 미국에서 맞는 스물 세 번째 3월 23일입니다. 제가 이민 온 것이 1990년 3월 23일이니 굳이 의미를 매기자면 그렇습니다. 올해로 미국 온 지 딱 22년이 되는 거죠. 시간의 흐름이 무섭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오래된 표현을 빌리자면, 정말 '엊그제 미국 온 것 같은데' 20년을 훌쩍 넘긴 세월의 무게가 쉽사리 실감나지 않습니다. 자라는 아이들을 보며, 또 제 빠진 머리를 보며 그 시간의 무게를 겨우 실감할 수 있다고나 할까요.

 

아, 물론 손에 쏙 들어오는 애기들이었던 지호와 지원이가 저만큼 자란 걸 보면서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실감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저 자신을 객관적으로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고, 그만큼 나이먹었다는 사실을 바로 실감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어쩌면 그것은 미국에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고, 그리고 물리적인 나이로는 중년 아저씨일지언정 정신적인 나이는 더더욱 청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의 반증일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거의 21년의 시간을 보냈고, 이제 미국에서 22년을 보냈습니다. 한국에 기성세대로 뿌리내리기 전에 미국에 왔다는 것이 제 삶에 어떤 변화를 끼쳤을까요? 아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어리버리 '말도 못 하는' 그런 상태에서, 백지가 되어 다시 부딪히며 써나간 삶의 이야기는 그 두께가 이제 한국에서 썼던 것보다 더 두꺼운 것이 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지만, 시간은 그렇게 솔직히 흘렀습니다.

 

처음 시애틀에 발디뎠던 그날처럼, 날씨는 화창하고 꽃들은 그 자태를 뽐냅니다. 벚꽃들은 화사하고, 나뭇가지엔 신록의 어린 잎사귀들이 자라나 처음으로 세상 구경을 하고 있습니다. 이젠 너무 익숙해진 정경이라 그때만큼의 감동은 없다고 해도, 저는 처음 이 땅을 밟았을 때의 정서적 충격 자체를 잊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마 제 삶의 이런 면들이 저를 기성 세대로 자리잡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싶습니다. 이제 물리적 나이가 60이나 되어야 저는 그때 쯤 저를 '중년의 기성세대'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 나서 자란 20년 조금 넘는 세월, 그리고 여기서 맞아야 했던, 정말로 다시 태어나 사는 기분으로 살아야 했던 20년은 겨우 흐른 시간 만큼의 정신적인 나이를 먹게 했을 지도 모릅니다. 이곳에서 3년 정도 방황을 했습니다. 그 방황을 마치고 나서 맞았던 시간부터 친다면, 아마 제가 진정으로 '다시 태어나 사는 것'은 오히려 20년이 안됐을지도 모르네요. 그렇다면 전 아직도 매우 젊은 삶을 사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하.

 

미국에 와서 만나 연애하고 결혼한 아내와, 그리고 우리의 사랑의 결실로 자라고 있는 두 아들들. 큰놈은 어느새 훌쩍 내 키를 넘겨 버렸고, 작은놈도 무섭게 자라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의 성장을 보면서 내가 '장년'이 됐음을 실감하지만, 아이들과 더불어 젊음을 노래하고 나름 주책맞게 젊게 살 수 있는 것은 내가 전혀 다른 두 세상을 걸쳐서 살아야 했던 때문일수도 있겠습니다.

 

미국 온 지 22년, 내가 진정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내 가족들, 그리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리고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가치들... 이런 것들을 지키며 살 수 있게 된 지금 내 모습에 감사하고, 내 자신에 대견스러움을 느낍니다. 제 삶을 분명히 사랑하기에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지금 내 모습이 좋습니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이 삶이 더욱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시애틀에서...

전체 2

  • 2012-06-14 10:47

    나를 진정 사랑하는 모습,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실천하고, 삶을 즐길 줄 아는 당신은 진정 멋진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이민 이후의 삶은 선물로 거저 받은 삶이었다고 어느 인도인이 영화를 통해서 고백했듯이, 감사하며 사는 님이 저는 또 감사합니다. 딴 얘기긴 하지만,  저희 부부 결혼 기념일이 3월 23일 이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저희 부부도 선물로 받은 삶에 감사하며 즐기며 살아야 겠습니다. 


  • 2015-10-29 20:58

    저 또한 잘 읽었네요. 한국에 있지만 왠지 모르게 공감이 가구요^^ 저는 한국에서 기성세대에 정착하는 것 보다는 미국에서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려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얽매여 있던 삶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쪽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과거를 돌이켜 보았을 때,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서요.ㅎㅎ. 하지만 요즘은 많이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이네요. 분명히 버려야 할 것들이 있기에...정말로 올바른 선택일까 ? 떠한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까?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지요. 걱정거리가 없을 거라 바라지 말고 고민에 물들지 않도록 주의하라고...제가 요즘 되새기는 문구 입니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순탄하기만 한 곳은 없겠지요. 다만, 그동안의 삶의 경험을 통해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곳에 한 발 더 내디딜 용기가 필요한 것이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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