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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정착기-예기치 않은 선물 준 미국 할머니의 추억

에세이
에세이
작성자
국경선
작성일
2007-01-18 23:20
조회
2970




지난해 11월 23일 이곳에 온 이후 주위에서 많은 분이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유형, 무형의 도움입니다. 돈으로 따지기에는 너무도 값진 도움입니다. 늦게나마 각별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아주 소중한 사례가 있습니다. 한 미국인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기억입니다. 거기에 중년의 시험관에 대한 기억도 유쾌합니다.

성탄절을 며칠 앞둔 지난해 12월 20일입니다. 운전면허 실기시험을 보기 위해 페더럴웨이 324가에 있는 DMV에 갔습니다. 잔뜩 겁을 집어 먹은 상태로 말입니다.

가기 전 주위에서 “한국에서 잘하는 운전이랍시고 와서 시험 본 사람 중 열에 아홉은 떨어진다. 애당초 한손으로 가볍게 핸들을 돌리거나 거들먹거리지 마라”는 충고 아닌 경고(?)를 들었습니다.

그런 마당이라 “신중하게 운전하는 초보자처럼 과연 보일 수 있을까,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핸들을 거꾸로 꺾지나 않을까”는 등의 걱정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게다가 소심해 앞에 뭔가 일을 놔두면 긴장하는 게 제 버릇이기도 하기에 적잖이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런데 가자마자 일이 꼬입니다. 산 지 20여일 된 중고차가 말썽을 부려 사무실 동료의 차를 빌렸습니다만 그 차의 보험기간이 만료돼 확인해보라는 것입니다.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중년의 시험관이 한마디를 하자 그야말로 허둥거리며 정신이 없었습니다.

말귀를 이해하려고 신경을 곤두세우랴, 전화통 붙잡고 동료에게 상황 설명하랴…. 그러나 그 시험관은 저의 당황을 눈치 챘는지 사무실서 기다릴 것이니 새 보험증서를 팩스로 보내라고 친절하게 일러줬습니다.

잠시 뒤 다행히 새 보험증서가 사무실에서 팩스로 도착하자 그 시험관은 다시 나와 옆에 앉아 간단한 손신호 테스트를 시작으로 실기를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리라는 마음으로 귀는 연방 쫑긋거리고 손바닥에 땀은 배이고….

긴장은 이내 예상치 않게 풀렸습니다. 한국근무 경험이 있는 시험관이 음식얘기를 꺼내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했습니다. 대구와 군산에서 군인으로 근무한 경험을 들며 비빔밥이며 불고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더군요.

맞장구를 쳤습니다. “나도 그 음식을 좋아 한다. 요리도 잘한다. 내 이름이 쿡(KOOK, 요리는 COOK)인 걸 보면 모르느냐.” 그 조크 하나로 상황은 끝났습니다. 시험관도 낄낄거리며 웃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운전이 아주 안전하고 훌륭하다는 생각지도 않은 칭찬이 이어졌습니다(사실 평소 거칠게 운전해 ‘레이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입니다만). 결과는 당연히 ‘통과’. 출발은 불안했지만 끝이 아주 좋았습니다.

하지만 더욱 기분 좋고 가슴 따뜻한 일은 바로 그 직후에 일어납니다. 임시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해 DMV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중이었습니다.

앞서 순서를 기다리던 사람이 돈을 내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기 전 동료로부터 실기시험 이후 임시면허증 발급과정은 사전에 교육(?)받지 못한 상태라 그때까지 자리에 앉아 숨죽이며 어떻게 발급받는지 알 수 없어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시험 통과 즉시 임시면허증을 주는지도 몰랐습니다. 눈치로 때려잡고 DMV 사무실로 들어간 것이죠. “뭔가 있긴 있을 텐데….” 머리를 굴리니 면허증 발급을 위해 돈을 내는 것 같은데 정확한 상황은 읽히지 않았습니다.

옆에 계신 칠십 다된 백인 할머니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시험 결과표를 보여주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적성검사를 위해 왔는데 자신과 똑같이 25달러를 내면 임시면허증을 준다고 하더군요.

지갑을 훑어봤습니다. 아차, 그런데 20달러 밖에 없었습니다. 사후과정을 몰라 준비도 못한 것입니다. 하릴 없이 아주 잠시 지갑을 구깃거렸습니다. 돌아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갑자기 그 할머니가 5달러를 내밀었습니다. 당황스러웠습니다. 무슨 의도로 내미는지 문화적인 이해나 관습, 언어소통이 정확치 않아 어떻게 해석할지 느낌이 오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여기 문 닫을 시간이 20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돈가지러 집에 다녀오면 오늘 넌 못한다. 집에 가면 내일로 면허증 발급을 미뤄야 한다. 이거 받고 면허증 받아라”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두 손을 강하게 가로저으며 괜찮다는 표시를 해보였습니다.

얼굴이 화끈거리며 왠지 떨떠름한 생각에 거절을 했습니다. 솔직히 다른 사람들이 선량한 백인 할머니가 돈 없는 동양인에게 적선하는 것으로 볼까봐 알량한 자존심이 발동했습니다.

그의 말은 이어졌습니다. “성탄절 선물이라고 생각해라. 나에게 갚을 생각일랑 말고 이 돈은 다른 사람에게 꼭 돌려줘라.” 간곡한 표정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흡사 유언하는 사람마냥 비장감마저 감돌았습니다. 주저하자 몇 차례나 그는 “No Problem!”을 외치며 강권하다시피 돈을 쥐어주었습니다.

마음이 찡했습니다. 입에서 말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순간 눈시울이 따뜻해지고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 정도까지 당신의 뜻을 들은 지라 달리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습니다.

“OK. I promise that I'll follow your good will. Thank you."

몇 차례의 거절 끝에 돈을 받았습니다.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그때 서야 고마움이 느껴졌습니다. 그의 마음이 따스하게 전해졌습니다.

5달러. 참 적은 돈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이역만리 먼 거리를 날아와 가뜩이나 주눅 든 이방인의 마음을 순식간에 녹였습니다. 오자마자 아파트 입주와 관련해 2주나 실랑이를 벌이며 진을 빼 이곳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진 자그마한 동양인의 가슴을 겨우 진정시켜 주었습니다.

지금껏 아직 그의 고운 뜻을 실천하지는 못했습니다. 조만간 하겠습니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gutm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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