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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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이 한국에서의 삶보다 더 길어지는 순간

에세이
에세이
작성자
권종상
작성일
2011-03-24 09:51
조회
2875

새벽 네 시 반. 눈이 일찍 떠집니다. 잠시 현실과 꿈의 경계를 왔다갔다 하는 것처럼 느껴지더니, 정신이 확실히 듭니다. 그리고 보니 특별한 날은 특별한 날이군요. 21년전 오늘 이 시간쯤에 저는 아마 두려운 마음과 설레이는 마음이 섞인 채로, 밤새 태평양을 건너온 노스웨스트 비행기 안에서 카페인이 들어간 음료들, 그러니까 콜라며 커피며를 주는대로 마시고 그 불안감과 더불어 카페인 기운 때문에 더욱 잠을 못 이뤘던 것 같습니다. 멀리 보이는 동녘 하늘이 부옇게 밝아오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발디디고 살아갈 땅이 과연 어떤 곳일까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발을 디딘 지, 그렇게 21년이 되는 날이군요. 우리나라를 떠난 시점도 제 만 21세 생일이 되기 얼마 전이었으니, 굳이 뭉뚱그려 말하자면, 이제부터는 미국에서 살아온 날들의 수가 우리나라에서 산 시간보다 많아지는 셈입니다. 정말 특별한 미래에 대한 계획도, 청운의 꿈 같은 것 보다도 그저 막연함과 불안함이 더 많았던 시간들. 미국에 처음 와서 적응하느라 보낸 시간은 3년 정도 됐던 것 같습니다. 늘 우리나라로 돌아가고 싶었던 그 3년, 부모님 속도 많이 썩혀드렸고, 참 철없는 짓거리도 많이 했었는데... 지금 뒤돌아보는 그 시간은 오히려 어쩌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시간이라고 감사할 수도 있겠군요. 그리고 뒤돌아보니, 제 스스로가 대견하다기보다는 지금의 저를 만들어준 제 주위의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고생길을 선택하신 아버지, 어머니, 내가 독립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의 삶터를 떠났을 때 제 자리를 메꾸어 준 동생들, 그리고 내게 격려와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벗들과 지인들...

 

예. 한국에서 만 스물 한 살, 그러니까 스물 두 살 생일을 채 맞기 전에 미국으로 건너와 이제 한국에서 살았던 것 만큼의 시간을 살아 냈습니다. 그러니 그 사회에서도, 또 여기서도, 그렇게 어쩌면 철이 다 못 들고 살아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아직 내 머리가 익기 전에 떠나온 한국이지만, 내 모든 생각과 행동 양식과 가치관의 토대가 된 것은 내 삶의 전반부를 차지했던 21년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21년 역시 전혀 새로운 말과 가치관과 생활 양식을 배워야 했던 시간들이었기에, 또 다른 '토대'가 될 수 있었고 저는 그것을 통해 양쪽 사회를 비교할 수 있는 눈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곳 이민자들은 흔히들 자기가 알고 있는 한국의 모습은 자기가 떠났던 바로 그 시점에서 단절된다고들 합니다. 아마 그 말은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한국'을 떠올릴 때,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 지금이라도 날아가 다시 공항을 밟으면 꼭 내가 떠나왔을 때의 그때 한국을 볼 것만 같습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은 늘 인터넷을 통해, 또 한국에 다녀오신 부모님이나 가족, 지인들을 통해 들으면서도 말입니다. 사실 그동안 엄청난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21년전 제가 노스웨스트 항공기를 타고 김포국제공항을 떠나왔던 그 때와 지금을 비교한다는 데는 무리가 있을 겁니다. 한국도, 미국도, 그리고 사람들도... 참 많이 변했습니다. 21년전 오늘 이곳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우리 식구를 맞아주셨던 삼촌은 이미 오래전에 고인이 되셨고, 나름 미래에 대한 마지막 도전이라며 의지를 불태우시던 부모님께서는 이미 현역에서 은퇴하셔서 나름 여유있는 은퇴자의 삶을 즐기고 계십니다. 저는 아내를 만났고, 결혼해서 이젠 두 징그런 아들넘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21년간의 변화의 무게는 저를 바꾸고 또 새로운 내 모습을 재단해 낸 셈이지만, 그래도 그 '틀'은 사실 우리나라에서 다 잡힌 셈이기도 합니다.

 

경계인이자 이방인이었던 삶. 그리고 이곳에서 진실로 내가 이 사회의 일원이 되겠다고 마음먹고 나서 새로 시작한 삶으로 바뀐 것은 생각해보면 그다지 오래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늘 불안한 경계에 서 있기만 했던 그 삶이 지금처럼 바뀌고 나서야, 저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을 문득 해 봅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마 '미국에서 살아온 시간'의 기점을 그때로 다시 조절해 잡아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물리적 시간은 이제 한국에서 산 시간보다 미국에서 살아온 시간이 더 길어지지만, 내 자신이 분명히 '미국이란 땅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정확히 갖게 된 것은 미국에 와서 몇년 후였으니까요.

 

아무튼, 이젠 이곳에서 살아온 시간이 내가 태어나서 지각을 갖기 시작하고 내 주위의 세상을 인식하며 살아온 시간들만을 따지면 훨씬 그 길이가 길어진 셈입니다. 어쩌면 내 자신이 주변인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으로서 시작되었을, 그러니까 내가 '해외 동포'라는 참 어색하고 어정쩡한 입장이라는 것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나서, 그리고 나서 저는 우리나라와 미국이라는 곳에 대한 이해의 폭이 더 넓어졌던 것 같기도 합니다. 아니, '삶'에 대한 이해가 그나마 조금 넓어졌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무리가 될 말은 아닌 듯 합니다.

 

비록 한국에서 나서 스물 한 해, 그리고 여기서 스물 한 해를 보내긴 했지만, 내 인생에서 앞으로 살아갈 시간은 이제 지금까지 살아왔던 시간만큼은 더 살게 되겠지요. 시간의 길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워 보내는가의 문제일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드는군요. 그래도 내 삶이 진정으로 행복했던 부분들은 내가 이곳에서 주어진 나의 몫을 다 하겠다고 마음먹고 나서부터의 부분에 대부분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 이곳에서 내게 주어진 몫을 하는 것. 이민자로서, 또 지역 사회에 나름 봉사하는 우체부로서,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내게 주어진 역할들을 충실하게 해 내는 것으로서 내게 지금부터 살아가는 삶은 진정한 나의 삶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살아온 시간의 저울들이 이제 미국에서 살아온 쪽으로 더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순간, 지금까지는 평행을 이루고 있는 시간의 천칭을 바라보는 제 마음엔 애상과 미소 역시 그 천칭 위에서 평행을 이루고 있는 듯 합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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