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시

케이시애틀 연재 에세이 시리즈:

38살, 박사 유학을 떠나다 | 될 때까지 하는 영어 회화 도전기 | 미운 오리 문과생 치과 의사 되다

나는 미국 고등학교 교사 (완결) | 시애틀로 간 백미와 현미 (완결) | 나의 첫 포틀랜드 (완결)

내가 만난 의인.

에세이
에세이
작성자
강봄
작성일
2010-12-23 21:49
조회
2498

 

 

                          things_30.gif  내가 만난 의인  things_30.gif

 

 

며칠 전, 앞집 개 누비가 새끼를 낳던 날 밤, 뒷집의 젊은 부인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누비는 첫 배인데도 새끼를 일곱 마리나 낳았고, 모두 건강했습니다.

그 눈도 못 뜬 것들이 서로 큰 젖을 차지하기 위해

자기 형제를 사정없이 떠넘기는 것을 보면서 섬뜩함을 느꼈고

첫 배에 일곱 마리씩이나 되는 새끼를 경험도 없으면서 느긋하게 거두고 있는 누비가 신통해서

한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뒷집은 이사 오면서부터 동네와는 일절 왕래가 없이 지냈기 때문에

그 집 사정을 자세히 알진 못합니다.

남편의 나이로 미루어 숨을 거둔 그 부인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진 않았고

무슨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앓아누운 지가 20년이나 됐다고 했습니다.

한 가지 다행한 것은 남편이 착하고 돈도 넉넉한 사람이라

치료는 원 없이 받다 갔다고 누군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부인을 먼 발치에서 두세 번 보다가 올 봄엔가 수변무대 공연장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남편이 나를 소개하자 “어머, 앞집 사는 총각이세요?” 하면서 희미하게 웃던

그 야윈 얼굴이 못내 지워지질 않습니다.

 

  한 30년 전 쯤, 누군가의 소개로 한 선배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 보는 눈이 없던 당시의 내 눈에 그 선배의 첫 인상에서 호감을 갖진 못했습니다.

그 선배는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읜 외아들이라고 했고

그의 어머니는 그 아들 하나만을 위해서 올 곧게 살아오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기대에 어긋남 없이 그 선배는 한국 유수의 대학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고

부산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기회에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선배의 어머니를 뵙는 순간 ‘나의 어머니가 저런 분이었다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자하셨고 모습도 고우셨습니다.

그런데, 그 집 분위기가 엄청 어색했던 건 나중에야 안 일이었지만

그의 부인에게 원인이 있었습니다.

그의 부인을 처음 보는 순간 이 선배와, 그의 어머니와, 이 집안과는 영 어울리질 않고

마치 물과 기름처럼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착하디착한 한 남성이 배우자를 잘못 만남으로 해서 생긴 비극이

이렇게나 끔찍한 것일 줄 당시의 나로서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써야겠습니다! 그 부인에게는 차마 못할 소리가 되겠지만 그래도 나는 써야겠습니다!

늦은 밤, 선배의 집을 나서면서 느낀 그 ‘이상함’에 이끌려

나는 나도 모르게 선배 부부를 집요하게 관찰하기 시작했고, 30년이 흘렀습니다.

그 선배는 정말이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이, 삼 년이 멀다하고 지방에서 지방으로 떠돌며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선배를 자주 만날 기회는 없었습니다.

일이 잘 되면 잘 되는대로, 안 되면 안 되는대로 내 머리는 복잡했고 생활은 뒤죽박죽이었지만

그 선배와 그의 부인의 얼굴이 나의 뇌리에서 영 지워지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성장 환경이 좋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그거지만 그 부인은 남들이,특히 시댁식구들이나 남편에게는 더욱 알리고 싶지 않은

어떤 남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의 부인이 정서적으로 몹시 불안해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선배의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시집살이를 시킬 분도 아니고 실제로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이 부인은 자신의 시어머니를 증오하고 저주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에게 한바탕 해대고 싶을 때마다 이 부인은 남편을 닦달하고 몰아붙였고

예리한 눈초리로 남편을 감시하다가

행여 손톱만큼이라도 자신보다 어머니에게 더 잘해준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자지러지는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24시간 불안하고 초조해 했고 행여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서 자신을 무시하지는 않는지

365일 날카로운 눈으로 남편을 지켜보았습니다.

손님들과 둘러앉은 식탁 같은데서 그녀는 자신의 그러한 속내를 숨기기 위해

미소를 잃지 않고 명랑함을 가장했지만 그녀가 한 마디만하면

거기 둘러앉은 손님들은 그 어색함에 어쩔 줄 몰라 모두들 못 견뎌하곤 했습니다.

그녀는 집안의 모든 일을, 큰일에서부터 아주 사소한 작은 일 하나까지도

그 결정권을 자신이 행사하지 않으면 용납이 안 되는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시어머니는 물론 남편에게도 한 마디 상의 없이 이런저런 큰일을 마구 해 붙이기 시작했는데 몇 년에 한 번씩 그 집을 방문할 때마다

그 집안의 달라진 내용들을 보면서 나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습니다.

그 달라진 내용이라는 게

평범한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감행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제일 바랐던 건 시어머니를 떼어 놓는 것, 시어머니와 따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그녀는 집요하게 밀어붙였습니다.

그 집 아이들을 보면서도 나는 측은한 마음, 동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광기가 그 집 딸들에게도 뻗히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부인에 관해서라면 이 보다 더한 이야기를 앞으로도 이 노트에 열 장은 더 쓸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어서 여기서 그치기로 하고

이젠 그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살면서 보아 온 부부가 도대체 몇 백, 몇 천, 몇 만 쌍이겠습니까.

그런데, 나는 이 선배와 같은 비참하고 처절한 남편을 이제까지 단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대한민국을 통틀어도 이 선배처럼 불쌍한 남편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라도 이혼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이 여성은 결혼해서는 안 될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라도, 훌륭하고 사랑이 넘친 사람이었다고 역사에 기록된 어떤 위인이라도

이 여성을 참고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 남편을 주저 없이 ‘의인’이라고 부르는 데는

이 선배가 단순히 그의 아내를 30년 넘게 참고 살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그런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내에 대한 그의 노력은 눈물겹다 못해 가슴을 죄는 것이었습니다.

선배는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포기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홀어머니와 자신의 두 딸을 봐서라도, 집안에 분란이 일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이라도 기꺼이 바치겠다고 단단히 각오한 사람 같았고

이제까지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저질러 온 죗값을 혼자 다 감당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신혼 초,아내가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렇게 즐겨하던 술,담배를 끊고 30년 넘게 유지 해 오는 사람이 흔치는 않을 것입니다.

자연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색함을 마구 뿜어내는 사람과 일, 이년도 아니고

30년을 한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고, 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생활하고 여행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다는 것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인의 가슴에는 날카롭고 긴 송곳이 밖을 향해 여러 개 돋아나 있는 사람입니다.

그 송곳을 자신의 심장에 깊이 박은 채 이 남편은, 그 부인을, 오늘도 꽉 끌어안고 있습니다.

그 부인은 이 남편이 아니었다면 어떤 남성을 만났더라도 살 수 없는 사람이었고

이 남편은 이 부인만 아니었다면 어떤 여자를 만났어도 행복했을 사람입니다.

이런 부인 때문에 이 사람 좋은 선배는 친구가 없습니다.

아내를 떼어 놓고 이 선배는 혼자 밖에 나가 노는 법이 없고

다른 사람들은 이 부인 때문에 이들 부부와 어울리기를 꺼려합니다.

이런 부인을 극진히 대우해 주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그의 남편뿐입니다.

선배는 모든 결정권을 아내에게 일임하고 아내가 무슨 결정을 하든

그 결정이 아무리 난처한 것이라도 즉석에서 “예스”하고

무조건 따라 가고 받쳐주기를 30년 동안 일관되게 해 왔습니다.

그러느라고 그의 머리카락은 다 빠져가고, 그의 표정엔 고통과 슬픔의 빛이 내 눈에 역력합니다.

아,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이 있더니, 정말이지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입니까!

 

만일 내가 하느님이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남편 앞에만은 꼭 나타나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위로해주고 싶습니다.

“슬퍼하지 말아라.

너의 그 갸륵한 정성과 희생이 내 보좌에까지 이르렀다.

내가 다 안다.

내가 가장 기뻐하는 일을 네가 해 내고 있다는 사실을.

내 눈에 너만큼 어여쁜 사람은 없다.

네가 이 일을 끝내고 나면

내가, 너를,

나의 가장 깊은 품에 안고 편히 쉬게 해 줄 것이다.”

  

여기서 여성들을 생각해 봅니다.

이 선배와는 반대로 무책임하고 잔인무도한 남편을 만나

평생을 눈물과 고통 속에 살면서도 오직 한 길,

사랑과 인내로 한 가정을 끝까지 떠받쳐 주었던 이름 없는 저 수많은 아내와 엄마들을!!!

이제부터는 남성이 그렇게 할 차례 입니다.

이 선배는 그러한 남편과 아버지의 창시자이고

그래서 이 선배는   내가 가슴에 사무치도록 존경하는 나만의 의인 입니다. things_34.gif

 

 

                                                     2007 년   강봄    양홍석

전체 0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164

이민생활이 한국에서의 삶보다 더 길어지는 순간

권종상 | 2011.03.24 | 추천 0 | 조회 2874
권종상 2011.03.24 0 2874
163

일회용

백마의환자 | 2011.02.17 | 추천 0 | 조회 2774
백마의환자 2011.02.17 0 2774
162

127 시간

백마의환자 | 2011.02.08 | 추천 0 | 조회 2426
백마의환자 2011.02.08 0 2426
161

나 돌아 갈래.

백마의환자 | 2011.01.18 | 추천 0 | 조회 2577
백마의환자 2011.01.18 0 2577
160

작심 삼백 육십 오일

백마의환자 | 2011.01.09 | 추천 0 | 조회 2549
백마의환자 2011.01.09 0 2549
159

그냥....

삿갓 | 2010.12.30 | 추천 0 | 조회 2837
삿갓 2010.12.30 0 2837
158

Tears

백마의환자 | 2010.12.24 | 추천 0 | 조회 2388
백마의환자 2010.12.24 0 2388
157

내가 만난 의인.

강봄 | 2010.12.23 | 추천 0 | 조회 2498
강봄 2010.12.23 0 2498
156

다방의 공중전화 (1)

백마의환자 | 2010.12.22 | 추천 0 | 조회 2504
백마의환자 2010.12.22 0 2504
155

집 나가는 엄마들,사라져가는 모성애.

강봄 | 2010.12.21 | 추천 0 | 조회 3023
강봄 2010.12.21 0 3023
154

어른을 위한 동화

백마의환자 | 2010.10.30 | 추천 0 | 조회 2344
백마의환자 2010.10.30 0 2344
153

우주의 절대법칙 한가지

davidrojd | 2010.10.28 | 추천 0 | 조회 2704
davidrojd 2010.10.28 0 2704
152

뒤늦게 알게 된 문명의 혜택(?), 그리고 트랜지스터 수신기의 추억

권종상 | 2010.10.19 | 추천 0 | 조회 2549
권종상 2010.10.19 0 2549
151

사랑의 업데이트

백마의환자 | 2010.10.04 | 추천 0 | 조회 2371
백마의환자 2010.10.04 0 2371
150

완전히 나 새됐어.

백마의환자 | 2010.10.04 | 추천 0 | 조회 2371
백마의환자 2010.10.04 0 2371
149

다투지 마라. (1)

백야 | 2010.10.03 | 추천 0 | 조회 2351
백야 2010.10.03 0 2351
148

우체부가 된 지 6년이 된 날 (5)

권종상 | 2010.10.02 | 추천 0 | 조회 2430
권종상 2010.10.02 0 2430
147

인생이 쓸쓸하거든... (2)

삿갓 | 2010.09.30 | 추천 0 | 조회 2315
삿갓 2010.09.30 0 2315
146

고향 나룻터. (2)

백야 | 2010.09.28 | 추천 0 | 조회 2220
백야 2010.09.28 0 2220
145

고백3 사랑의 아련함 (1)

중년의 아줌마 | 2010.09.11 | 추천 0 | 조회 2343
중년의 아줌마 2010.09.11 0 2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