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시

케이시애틀 연재 에세이 시리즈:

38살, 박사 유학을 떠나다 | 될 때까지 하는 영어 회화 도전기 | 미운 오리 문과생 치과 의사 되다

나는 미국 고등학교 교사 (완결) | 시애틀로 간 백미와 현미 (완결) | 나의 첫 포틀랜드 (완결)

뒤늦게 알게 된 문명의 혜택(?), 그리고 트랜지스터 수신기의 추억

에세이
에세이
작성자
권종상
작성일
2010-10-19 11:37
조회
2550

확실히, 문명의 이기의 혜택을 덜 받긴 덜 받은 모양입니다. 우리 집에서 성당 구역회가 있는 까닭에 방과 응접실을 치우다가 발견한 내 전화기 전용 이어폰을 전화기에 끼운 후 이것저것 기능을 첵업해보니, 라디오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사 깨달았습니다. 아마 아이들 같으면 별로 흥분하지 않을, 그저 평범한 기능이겠지만, 어렸을 적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안녕하세요 김기덕입니다' 같은 프로그램을 들어본 경험이 있는(그것도 수업시간에 몰래) 사람들은 아마 제 흥분을 조금은 이해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몇 석 짜리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트랜지스터 수신기를 조립해 본 세대라면, 아마 더욱 절 이해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 저는 사실 여러가지로 제가 '나이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된장할.

 

그래서, 어제 아침부터 오늘 일 하는 지금까지도, 라디오(전화기)의 채널을 클래식 전문 채널 king.FM 에 맞춰 놓고 귀를 혹사시키고 있습니다. 대략 오늘 들은 방송만으로도 귀가 호사한 느낌입니다.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아들인 요한 크리스천 바하의 곡들과 모짜르트 몇 개, 쇼팽의 마주르카와 귀에 익지 않은 현대음악 몇 개를 들으며 우편배달을 했는데, 발걸음이 그렇게 경쾌해지는군요.

 

그렇게 음악을 접하다보니, 문득 이상한 데로까지 생각이 튑니다. 클래식음악을 듣는 것은 어쩌면 와인을 마시는 것과 그리도 비슷할까요. 사실 어렸을 때 클래식에 친해지는 것은 힘들었습니다. 물론 아름다운 소품들부터 시작하고 그런 것들이 먼저 귀에 다가오기 시작하고, 그러다보니 점점 나름으로 깊이 있는 곡들로 다가간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고, 문득 그걸 와인 배울 때와 비교해보니 처음 가벼운 맛의 리즐링이나 셰닌 블랑을 마시기 시작할 때가 생각나더군요. 그러다가 점점 나름 깊은 맛의 와인들을 찾아내기 시작하고, 그런 것들을 스스로 찾아 마시기 시작하고, 이 와인은 어떤 맛일까, 저 와인은 어떤 맛일까 궁금해 하던 그 시절들이 느닷없이 생각나더라는거죠.

 

하긴, 이제 음악을 듣기 시작한것도, 와인을 마시기 시작한것도, 꽤 시간이 묵은 취미가 되긴 한 듯 합니다. 점점 음악에 빠져들면서 똑같은 베토벤이라도, 그것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한 것인가, 혹은 로린 마젤이 지휘한 것인가, 아니면 레너드 번스타인인가에 따라 그 맛이 다르듯, 이젠 똑같은 '워싱턴산 카버네 소비뇽'이라도 버나드 그리핀의 랍 그리핀이 손을 댔는가, 아니면 레콜 41의 찰스 홉스가 손을 댔는가에 따라 맛이 틀리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니,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는 걸까요? 내가 어린아이들이라면 당연히 찾아내고 마음대로 즐길 것들을 뒤늦게 우연히 발견해 즐기게 되면서, 나이가 먹는다는 것은 그만큼 뭔가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알아간다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내 삶에 안정감이 된다는 것... 이런저런 생각들이 묻혀가는, 그런 가을날 이른 오후입니다. 거리엔 한잎 두잎 낙엽이 떨어지고, 다람쥐들은 길가에 떨어진 밤 줏느라 정신없이 뛰고 있는, 그런 캐피틀 힐의 오후에 저는 이제 점심을 천천히 마치고 다시 거리로 나가려 합니다. 아, 귀에 다시 이어폰 꽂아야지요. 하하.

 

 

시애틀에서... 

전체 0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164

이민생활이 한국에서의 삶보다 더 길어지는 순간

권종상 | 2011.03.24 | 추천 0 | 조회 2875
권종상 2011.03.24 0 2875
163

일회용

백마의환자 | 2011.02.17 | 추천 0 | 조회 2774
백마의환자 2011.02.17 0 2774
162

127 시간

백마의환자 | 2011.02.08 | 추천 0 | 조회 2426
백마의환자 2011.02.08 0 2426
161

나 돌아 갈래.

백마의환자 | 2011.01.18 | 추천 0 | 조회 2577
백마의환자 2011.01.18 0 2577
160

작심 삼백 육십 오일

백마의환자 | 2011.01.09 | 추천 0 | 조회 2549
백마의환자 2011.01.09 0 2549
159

그냥....

삿갓 | 2010.12.30 | 추천 0 | 조회 2837
삿갓 2010.12.30 0 2837
158

Tears

백마의환자 | 2010.12.24 | 추천 0 | 조회 2388
백마의환자 2010.12.24 0 2388
157

내가 만난 의인.

강봄 | 2010.12.23 | 추천 0 | 조회 2498
강봄 2010.12.23 0 2498
156

다방의 공중전화 (1)

백마의환자 | 2010.12.22 | 추천 0 | 조회 2504
백마의환자 2010.12.22 0 2504
155

집 나가는 엄마들,사라져가는 모성애.

강봄 | 2010.12.21 | 추천 0 | 조회 3024
강봄 2010.12.21 0 3024
154

어른을 위한 동화

백마의환자 | 2010.10.30 | 추천 0 | 조회 2345
백마의환자 2010.10.30 0 2345
153

우주의 절대법칙 한가지

davidrojd | 2010.10.28 | 추천 0 | 조회 2705
davidrojd 2010.10.28 0 2705
152

뒤늦게 알게 된 문명의 혜택(?), 그리고 트랜지스터 수신기의 추억

권종상 | 2010.10.19 | 추천 0 | 조회 2550
권종상 2010.10.19 0 2550
151

사랑의 업데이트

백마의환자 | 2010.10.04 | 추천 0 | 조회 2371
백마의환자 2010.10.04 0 2371
150

완전히 나 새됐어.

백마의환자 | 2010.10.04 | 추천 0 | 조회 2372
백마의환자 2010.10.04 0 2372
149

다투지 마라. (1)

백야 | 2010.10.03 | 추천 0 | 조회 2351
백야 2010.10.03 0 2351
148

우체부가 된 지 6년이 된 날 (5)

권종상 | 2010.10.02 | 추천 0 | 조회 2430
권종상 2010.10.02 0 2430
147

인생이 쓸쓸하거든... (2)

삿갓 | 2010.09.30 | 추천 0 | 조회 2316
삿갓 2010.09.30 0 2316
146

고향 나룻터. (2)

백야 | 2010.09.28 | 추천 0 | 조회 2221
백야 2010.09.28 0 2221
145

고백3 사랑의 아련함 (1)

중년의 아줌마 | 2010.09.11 | 추천 0 | 조회 2343
중년의 아줌마 2010.09.11 0 2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