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시

케이시애틀 연재 에세이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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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부가 된 지 6년이 된 날

에세이
에세이
작성자
권종상
작성일
2010-10-02 12:20
조회
2431


저는 정년퇴직으로 밀려날 염려가 없는 평생직장이라 할 수 있는 미 연방우정국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철밥통'의 조건을 갖추려면 정확히 세 개의 벽을 넘어야만 합니다. 첫째는 일단 임용되고 나서 누구나 겪어야 하는 세 달간의
수습기간입니다. '프로베이션'이라고 불리우는 이 기간동안 일을 열심히 잘 한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이 프로베이션 기간
동안에는 어떤 이유로든지 잘릴 수 있고, 또 잘려도 아무말 못하기 때문에 아파도 일 나가야 하고, 지각도 못 합니다. 한마디로
정신 번쩍 드는 기간이죠. 저도 이때의 90일이 제 인생에서 제일 길었던 90일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문득 해 봅니다.

두번째로는 레귤러가 되어야 합니다. PTF(Part Time Flexible: 상비보조우체부)로만 남아있으면 아무래도
불안하고, 또 안정된 직장이라고 할 수가 없지요. 특히 우체부의 경우, 자기가 항상 가는 라우트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물론 자기 라우트 따로 없는 레귤러 우체부들도 있지만, 이들은 리저브, 혹은 T-6 와 같은 이름의 별정직을 수행하는 거지요.
리저브는 우체국에서 지정하는 아무 라우트나 간다는 면에선 PTF와 같지만, 일단 레귤러이기 때문에 우체국에서 지급하는 각종 혜택을
모두 누릴 수 있고, 또 자기가 '책임지는 라우트'가 없다는 면에서 다른 우체부들보다 라우트 관리라는 면에서는 자유롭습니다.
'캐리어 테크니션'이라는 정식 이름을 가지고 있는 T-6 는 다섯 개의 라우트를 돌아가며 매번 해당 라우트의 우체부가 비번일
때마다 그 라우트를 메꿔 줍니다. 이것은 우체부들도 일주일에 5일 일하지만, 실제 배달은 6일동안 이뤄지기 때문에 있는
제도입니다. 항상 다섯 개의 라우트를 맡아 돌기 때문에 이들은 수당이 조금 더 높습니다. 그래도 자기 라우트를 가지고 있는
레귤러만큼 마음 편하기는 힘들죠.

마지막으로, 근무 연한이 6년이 넘어가야 합니다. 연방우정국 규정에 따르면, 근무 연한이 6년이 채 안된 직원들은 만일 재정적인 비상 사태가 닥쳤을 때 언제든지 해고통지서를 받을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004년 10월 1일자로 발령을 받았던 저는, 오늘로 드디어 6년의 근무 연한을 채웠습니다.

 

문득 지난 세월들을 회상해보게 됩니다. 처음 교육 받을 때의 두려움. 내가 과연 이걸 잘 할수 있을까 하는 생각. 꾸준히 잘
해야 할 텐데 하는 걱정. 처음에 자대배치(?)를 받아 갔던 웨스트우드 우체국 내부의 생경함. 우체통들과 주소들을 제대로 찾지
못해 이리저리 뛰던 때의 불안감. 힘든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밥도 못 먹으며 뛰어야 했던 초창기 시절들, 그리고 일이 익숙해지자마자
브로드웨이 우체국으로 쫒겨나다시피 밀려날 때의 억울함. 여기 와서 처음에 일이 너무 힘들어 먹어야 했던 눈물밥. 그러나 이렇게
6년이 흐르고 보니, 힘들었던 일들보다는 기쁘고 아름다운 일들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 브로드웨이에서 처음 적응이 힘들었던
것은 이곳 사람들은 똑같은 시애틀 안이라도 교외지역, 이른바 서브어번 지역에 사는 이들과는 완전히 다른 마인드를 지녔기
때문이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익숙해져 있던 모습이 아닌 미국에서의 직장생활은 처음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곳도 점점 내
정든 지역이 되 가면서, 저는 지금 두 개의 다른 세상을 왔다갔다 하며 살아가는 기분입니다. 여유로움과 느림의 미학이 가득한 교외
주거지역에서의 제 생활은 집에 있을 때의 제 모습이고, 바쁘고 정신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급템포의 생활은 직장에서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지역에서 보는 사람들의 외관 역시도 그렇게 다릅니다. 살찐 사람이라고는 보기 힘든 브로드웨이에서 저는 뉴욕
같은 대도시의 삶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교외에서 거주하고 일하는 이들과 도심지에서 사는 이들의 낭만과 멋을 표현하는 방식은 참 틀리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것은
그들의 외관에서도 나타납니다. 조금은 날선 모습의 방어적인 사람들. 그렇지만 일단 마음을 열면 진한 끈끈함을 가지고 다가서는 것이
브로드웨이의 사람들입니다. 제가 거주하는 지역인 시애틀 남쪽 페더럴웨이의 사람들은 일단 움직임에도 여유가 있고, 운전할 때
양보도 잘 하고, 호인들이 많은 대신 그냥 퍼져 있는 모습으로 보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같은 지역이라도, 이렇게 생활권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의 문화를 보이는 것을 그냥 눈으로 보고 즐기는 것도 즐겁지만, 저는 그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지역을 출퇴근하며 그
삶의 방식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대해서도 감사합니다.

 

어쨌든, 오늘은 제겐 의미깊은 날입니다. 처음 웨스트우드에서 근무할 때 보았던 80세가 넘었던 우체부. 그는 아마 지금
은퇴했을 겁니다. 저도 그 분과 같은 '노장'이 되어 있을까요? 이런 저런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 우편물을 배달하다 보면, 아마
눈앞에 펼쳐진 스페이스 니들과 시애틀 다운타운의 모습도 색다르게 보일 듯 합니다. 내 나름대로 이 이방에 뿌리를 내리고, 이곳의
일부분이 되어 살게 된 것은 애초에 내 나름대로 내가 속한 사회에 봉사하면서 살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찾아 보려 했고, 그 꿈이
어느정도 이뤄졌다는 것의 반증일 터입니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제 삶을 담은 방송이 우리나라의 공중파
TV를 타기도 했고, 그 덕에 졸고나마 책도 하나 써낼 수 있었습니다. 나름 최선을 다해서 이웃과 더불어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제 삶은 그런 방향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내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건강한 일원으로 소통하며, 또 도우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다지게 됩니다.

 

 

시애틀에서...


전체 5

  • 2010-10-02 17:59

    육년을 잘 견뎌내신 씨애틀 우체부님께 축하를 드립니다. 

    님의 글을 읽고, 늘상 대하는 일들이 그리고 편지 한 통이  감사함으로 다가 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어려움도 잘 견뎌내신 님이 자랑 스럽습니다. 


    • 2010-10-02 20:05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살께요.


  • 2010-10-03 00:03

    그 어떤 시보다 아름다운 글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 2010-10-04 06:14

      예, 감사드립니다.


  • 2010-12-02 19:13

    권 종상씨의 에세이를 읽을 때 마다 글에 대한 감미로움과 다정함 그리고 인생을 달관하는 듣 풍부 한 인생 경험을 자아내고 인생의 길 자비가 되어지고 있음을 볼수 있읍니다. Seattle 우체부 에세이 집도 읽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읍니다. 정치 경재 사회 문화 다각적인면에 풍부한 지식이 농축되어 있었으며, 이민 생활에도 길자비가 되고 있으뿐만 아니라, 삶의 길자비 이기도 하고요, 특히 젊으니들이많이 읽었으면 살아가는데 좋은 이정표가 될것으로 믿습니다.

        항상 좋은 글을 써 주신데 대하여 감사의 마음으로 이 글을  드립니다.

       

    Mattew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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