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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시애틀 연재 에세이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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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셋은 어떻게 연결해요?

에세이
작성자
KReporter3
작성일
2022-11-07 13:44
조회
175

나의 첫 포틀랜드 (2화)

 

나는 출국을 앞두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비행기를 타는 일도 익숙하지 않은데 설상가상 혼자 떠나는 초행길이었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내가 무사히 도달해야 하는 도착지까지의 여정은 여간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러다 보니 막막함과 불필요한 걱정, 근심이 내게 달라붙어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고 나는 그것들을 등에 업은 채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출국날이 다가올수록 공항에 가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비행기에 타서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충분히 숙지해 놔야겠다는 강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일에 필요 이상의 걱정이 앞선지라 인터넷을 쥐 잡듯 뒤져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했고 머릿속으로 몇 번의 연습까지 해야만 안심이 되었다.

 

경험이 없는 초짜에겐 공항에 도착한 이후의 모든 일이 한 번도 풀어 보지 않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실전과도 같았다. 그래서일까. 앞으로 펼쳐질 미지의 일들을 떠올리면 설레는 마음에 한껏 들뜨기도 했지만 그저 어떤 상황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그 불확실성 때문에 머릿속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망상의 태엽으로 편히 쉴 틈조차 없었다.

 

포틀랜드로 가는 길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비행기에 탑승하면 그대로 목적지에 도착할 거라 생각했던 나는 포틀랜드 항공편은 직항이 없어서 중간에 한번 경유해야 한다는 사실에 아찔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냥 비행기에 타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서는데 이젠 낯선 미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는 일까지 해내야 한다니. 신경 써야 하는 일이 조금씩 늘어날 때마다 세상은 여러모로 호락호락하지 않다며 속으로 구시렁대곤 했다. 경유지로 선택할 수 있는 도시는 내 기억으론 두 군데가 있었는데 그중 사람들이 경유지로 많이 이용하면서(적어도 내가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포틀랜드와 가장 가까운 도시인 시애틀을 선택했다. 시애틀과 포틀랜드는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가는 거리로 아주 가깝기 때문에 나에겐 어느 경유지보다 최고의 선택이었다.

 

한국에서 시애틀까지 거의 12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나는 긴 비행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내기 위해 평소에 잘 읽지 못했던 책을 실컷 읽어보기로 다짐했다. 아무래도 비행이 익숙하지 않은 터라 긴 시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보낼 수 있을지 고민을 꽤 했다. 보통 잠을 자거나 영화나 책을 본다는 이야기가 많아서 나도 그런 식으로 시간을 때우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책을 가져갈까 고민하다가 며칠 전 중고로 구매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챙기기로 했다. 그래도 시간이 긴데 두 권은 챙겨야 하는 건 아닌가 잠깐 고민을 했지만 아무래도 완독 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지 않아 딱 한권만 가방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결국 총 세 권의 책과 함께 비행기에 탑승하고 만다. 그 이유인즉슨,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공항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서점을 발견해버린 것이다. 그냥 구경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기어코 책을 구매하고 말았다. 그것도 이토 준지의 <사자의 상사병>과 아즈마 키요히코의 <요츠바랑>을. 두 권 다 만화책이어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츠바랑>은 예전부터 즐겨 보던 만화책이었는데 <사자의 상사병>은 이토 준지 만화에 입문하고자 구매해봤다. 그때만 해도 나는 책 세 권에 이상하게 든든했던 기억이다. 이 정도면 장거리 비행도 눈 깜빡할 사이에 끝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한껏 무거워진 거대한 백팩을 등에 업고 부모님과 작별 인사를 한 뒤 씩씩하지만 다소 얼떨떨한 모습을 한 채 출국장으로 향했다.

 

완전히 혼자 남겨지고 나니 그제야 슬슬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아 내가 정말 혼자 미국에 가는구나.' 해외와는 아예 연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내가 꿈에 그리던 미국으로 그것도 혼자서 떠난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긴장 속에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고 점점 커져가는 설렘으로 엔도르핀이 몸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걸을 때마다 분출되는 느낌이었다.

 

마침내 비행기에 탑승하고 줄 지어 들어가는 사람들을 따라 내 자리를 찾기 위해 요리조리 두리번거렸다. 내가 예약한 좌석은 통로 쪽 좌석이었다. 사실 창가 쪽 좌석에 앉아 하늘 위 구름을 구경하고 지나치는 도시나 마을을 보며 저긴 어딜까, 혼자 추리하며 가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화장실에 가려면 바깥쪽이 나을 것 같다는 나름의 논리에 의해 통로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안내방송이 흘러나왔고 잠시 후 비행기가 이륙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한 뒤 최대한 비행기를 많이 타 본 승객인 척하기 위해 애썼다. 그때만 해도 대충 그런 척 흉내를 내면 언뜻 그렇게 보인다고 생각했던 때였다. 왠지 어설프게 보이는 것이 싫어서 내가 이 상황을 낯설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일에 신경을 많이 썼다. 비행기는 순식간에 하늘 위로 두둥실 떠올랐고 나는 계획해 온 일명 '장거리 비행시간 죽이기'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해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우두커니 앉아있는데 곧바로 좌불안석이 되는 바람에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하지만 내가 책을 꺼낸 지 1분도 채 안돼서 기내 소등을 해버리는 바람에 도로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선 책을 읽기는커녕 내가 무슨 책을 읽는지 조차 알기 힘들 정도였다. 갑자기 어두워진 비행기 안에서 홀로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사람은 오직 나뿐인 듯했다. 다들 어찌나 편안한 모습으로 좌석에 몸을 맡기고 있던지. 역시 신입과 경력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불 꺼진 기내는 상당히 고요한 분위기였다. 잠을 자는 데 있어 최적의 환경이었고 몇몇 사람들은 벌써 잠에 들어있었다. 나도 그들처럼 잠을 자야 할지 망설여졌다. 사실 잠이야말로 시간을 때우는 데 있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내가 계획한 프로젝트에도 '잠자기' 항목이 있었는데 그건 아끼고 아끼다 더 이상 할 게 없을 때 실행하는 가장 최후의 선택지였다. 이미 독서도 물 건너간 판에 독서 아님 수면이라는 방법만 생각했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내 왼편에 앉은 여성이 앞 좌석에 붙어있는 티브이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영화 한 편 정도 보면 긴장이 좀 풀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화면을 눌러 영화를 고르기 시작했다. 거기까진 큰 문제없이 할 수 있었는데 곧바로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헤드셋을 어디에 연결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것이다. 티 나지 않게 옆사람을 슬쩍 쳐다보고 연결 구멍이 팔받침대 쪽에 있다는 걸 확인했는데 이리저리 더듬어 봐도 헤드셋이 꽂혀야 하는 구멍을 찾을 수 없었다. 정말 난감했다. 큰 마음먹고 영화를 보고자 결심했건만 보는 방법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니 미칠 지경이었다. 손을 받침대에 대고 꼼지락 거리다가 도저히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것 같다는 판단 하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3초 정도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옆자리 여성의 팔을 톡톡 쳤다. 드라마 자막이 일본어인 걸로 보아 어쩌면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영어로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말없이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나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살짝 놀란 것처럼 보였지만 내가 간절한 몸짓으로 '도대체 이 헤드셋은 어떻게 연결했나요?'라고 물어보니 곧장 어디에 연결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그녀 덕분에 나는 가까스로 헤드셋을 연결할 수 있었고 마침내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왠지 마음이 든든해지면서 편안해지는 것이 이 낯선 곳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롭게 영화를 골라 틀었지만 아쉽게도 나의 첫 장거리 비행에서의 든든한 친구가 되지는 못하였다. 한 2분 정도 지났을 때 영화 보기를 포기하고 티브이를 껐다. 이상하게도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내 눈은 그것들을 제때 담지 못했고 주인공의 대사와 행동마저 어딘가 불편해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얼마나 그 영화에 집중하지 못했냐면 어떤 영화를 봤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이다. 평소 영화 보는 걸 좋아해서 매번 볼 때마다 집중해서 빠져들던 나인데 그때만큼은 처음으로 도통 영화에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나는 내 생각보다 홀로 머나먼 타국으로 가는 일에 긴장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긴 시간 동안 앉아 있던 좌석도 뼈대만 남은 딱딱한 의자에 앉은 듯한 느낌이었고 모든 상황이 낯설어서인지 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기분에 불편함만 지속되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까지 긴장을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12시간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시애틀에 도착했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눈을 감고 자는 척하길 반복하며 버텨낸 긴 시간들이었다. 화장실에 자주 가는 편이라 일부러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으며 자리를 묵묵히 지켰다. 누가 내 자리를 탐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제 시애틀에서 입국 심사를 마치고 무사히 포틀랜드행 비행기에 탑승하면 내게 큰 걱정이었던 비행 일정을 끝마칠 수 있었다. 짐을 챙기고 비행기에서 내려 사람들을 따라가니 기쁨도 잠시요, 길게 늘어진 두 번째 난관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난도 높은 입국 심사와의 시간 싸움이었다.


 

이 에세이는 브런치 작가 김수연 님이 제공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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