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시

케이시애틀 연재 에세이 시리즈:

38살, 박사 유학을 떠나다 | 될 때까지 하는 영어 회화 도전기 | 미운 오리 문과생 치과 의사 되다

나는 미국 고등학교 교사 (완결) | 시애틀로 간 백미와 현미 (완결) | 나의 첫 포틀랜드 (완결)

수포자가 수복자를 만나면 - 어떻게 삼각형 공식을 잊어버려?

에세이
작성자
KReporter3
작성일
2022-11-03 12:16
조회
183

미운 오리 문과생 치과 의사 되다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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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방학이 시작되는 무렵, 미국에 도착했다. 그 일주일간 나는 할 일이 많았다. Returning student 혹은 post-bac student, 즉 복학생의 타이틀로 온 나는 먼저 봄학기 수강신청을 해야 했는데, 그 절차 전에 ‘Placement test’라는 일종에 레벨 테스트를 봐야 했다. 학교를 떠난 지 오래됐으니 수학과 영어 시험을 보고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한 후에 수강을 신청하라는 시스템이었다.

영어는 그렇다 치고, 수학 레벨 테스트를 본다는 얘기는 학교에 와서 들어버린 터라 좀 허둥지둥 댔다. 누군가 미리 살짝궁 귀띔이라도 해줬으면 한국에서 중학교 수학부터 보고 왔을 텐데. 분수, 인수분해, 함수까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미국 수학에 대해서는 들은 이야기가 있어 조금 안심은 갔다. 예를 들면, 한국 사람들 수준의 수학이면 미국에서는 알아준다라든가, 미국애들은 다 계산기를 쓰니, 굳이 한국 수준의 수학만큼 몰라도 된다라든가. 이런 말들이 잠깐 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 주었다.

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시험을 치렀다. 맨땅에 헤딩이었다. 사실 어차피 시간도 많이 없었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이었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당시 내 수학 실력은 평균 한국인 수학 실력의 발끝도 못 미치는 상황이었다.

두둥! 시험 결과는 제대로 참패였다. 수학이란 과목이 손에서 떠난 지 7년 이상이 지났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핑계를 대본다. 영어는 그럭저럭 나왔기에 정상적인 수업을 수강할 수 있었지만, 수학은... 백점만점에 30점!!! 제대로 수포자 점수가 나왔다. 사실 한국에서도 맞아 보지 못한 수학 점수였다. 집에 가고 싶었다. 아무리 ‘수포자’라고 해도 삼각형 넓이 구하는 공식 따위는 생각이 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쌍절곤’을 들이밀던, 그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며 물었다.
삼각형 공식이 뭐지?”
“밑변 x 높이 x 1/2이지!”,
“아 맞다!”

나는 왜 그렇게도 그 쉬운 공식이 생각이 나질 않았을까! 이것은 마치 ‘수저’를 앞에 두고 그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은 것과 같았다. 일종의 수학 치매가 온 것이다.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들, 수학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면 끝이야! 하지만 영어는 평생 간다!” 나는 이 말만 철석같이 믿고, 수학을 포기해 버리고 영어에만 올인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 유학을 시작하고부터 수학은 나를 외면했고, 치대 입학시험에서도 수학은 나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치대에 들어가서도 나는 ‘통계학’이라는 과목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제는 내 남편이 된 그 친구는 지금도 내가 삼각형 공식도 잘 모르는 사람이 치대 공부를 하러 미국을 왔었다며, 나를 놀리곤 한다. 내가 삼각형 공식을 물어볼 때는, 진심으로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단다. 농담이었겠니.

그 당시 남편은 문과생이긴 했지만, 수학을 꽤나 잘하는 학생이었다. 머리가 좋아서 수학잘한 것이 아니라, 수학을 잘하지 못해서,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수학 문제지를 작정하고 전부 다 풀어 해치웠다고 했다.

집이 넉넉지 않았던 고등학교 시절, 수학 선생님에게 부탁해 선생님이 쓰지 않는 수학 문제집을 공짜로 받아 그것마저 다 풀어버리고, 종로의 큰 서점에서 쭈그리고 앉아 연습장과 수학 문제집을 펴놓고 하루 종일 수학문제지독파했단다. 매일 오후만 되면 서점 바닥에 장시간 죽치고 앉아 수학 문제를 외우다시피 하는 통에 서점 점원에게 눈치도 많이 받고, 어떤 날은 싸우다 시피하며 쫓겨나기도 했다고 한다.

한 번은 여름방학에 학교에서 늦게까지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옷을 벗었는데, 허벅지 뒤쪽이 쓰라려 만져보니, 살갗이 다 벗겨져 있었다. 그것을 그제야 알아차린 것이었다. 뒤늦게 느껴지는 통증으로 밤새 고생했단다. 문제는 그날 하루 종일 학교에서 수학 문제를 푸느라 화장실도 가지 않은 채, 장시간 앉아 있던 결과로 땀띠가 올라왔는데 그걸 모르고 하루를 보낸 것이었다. 이미 살갗은 다 벗겨져서 빨갛게 된 상태였다.

지금도 남편의 허벅지는 그날의 혹독한 노력의 증거로 거뭇거뭇한 흉터가 남아있다. 남편은 나처럼 수학을 포기한다고 ‘수포자’가 된 것이 아니라 수학을 정복한 ‘수복자’가 되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수학 과목만은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음을 보여준 산 증인이다. 그의 흉터를 볼 때마다 모든 찬란한 결과 뒤에는 피나는 노력이 숨겨져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사실, ‘수복자’들이나 치대 공부를 해야지, 나 같은 ‘수포자’가 과연 견뎌낼 수 있을지 처음부터 의문투성이였다. 내가 들어야 하는 수학 과목은 가장 베이식인 '006 Algebra!' 사실, 그 당시엔 그 과목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Adviser(수강 도움 선생님)가 하라는 대로 신청을 했다. 되돌릴 수도 없었기에.

막상 수업이 시작되고 강의실에 앉아보니, 웬걸! 이건 중학교 1학년 수준의 수학이었다. 시험 결과만 30점이었지, 수업 내용은 이미 내가 다 알고 있는 것이었고, 굳이 앉아서 시간을 버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점수는 점수인 것을. 어쩔 수 없이 봄학기 내내 나는 더하기, 빼기 같은 수학도 아닌 산수문제를 거의 매일매일 손가락에 굳은살이 두껍게 맺힐 때까지, 종이에 빼곡히 적어 제출해야 했다. 아, 나는 산수 숙제의 산더미에 파묻히고 말았다. 오, 주여!

남편은 그때, 나를 혼자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나는 요즘도 “그럼, 수학 못하는 것 때문에 나를 동정한 거야? 그래, 사랑이 아니라 연민의 정이겠지!”라고 비아냥거리며, 남편의 순수한 사랑에 찬물을 끼얹는다.

아직도 남편은 매일 숫자놀이를 한다. 정말 말 그대로 숫자는 그에게 놀이에 불과하다. 병원 재정관리, 은퇴 재정관리, 주식관리 등등. 매일 퇴근 후, 남편은 숫자 이야기에 흥분된 상태로 나에게 자기가 계산해 놓은 파일들을 줄줄이 보여주며, 내가 관심을 보여주길 바란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긴 하지만, 고작 3분이 지나면, 벌써 내 머릿속은 아수라장이 된다. 처음엔 남편이 삐지기 일쑤였지만, 이제는 비로소 이해한다. 숫자에 약한 내가 3분 동안 집중을 했다면, 아주 큰 관심을 보여준 것이라는 것을.

남편은 나보다 2년 늦게 치대를 시작했지만, 수학 과목에 있어서는 나를 훨씬 앞질렀기에 여러모로 나에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치대 입학시험인 DAT(Dental Admission Test) 과목의 수학 문제도 남편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치대 3학년 때 들어야 했던, ‘통계학’ 과목도 그의 도움 덕분에, 무난히 잘 통과했다. 통계학 시험이 있는 며칠 전날 밤부터, 족집게 강의를 듣기 위해 매번 며칠 밤을 새웠었다.

남편에게는 쉬웠을 그 문제들이 나는 너무도 어려웠다. 덜컥 거리며 조금씩 이해하며 앞으로 가는 나를 위해 무던히도 참고 기다려준 남편이 고맙다.

언젠가 한 번은 나와 내 남편의 최애 TV 프로그램인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나이가 80이 넘은 학구파 할아버지가 나온 적이 있었다. 특이했던 것은 그 할아버지는 수학을 너무 좋아하셔서 그 나이에도 수학 문제집으로 매일 공부를 하고 손자, 손녀들의 수학을 기쁘게 가르치시는 분이었다. 바르고 따뜻한 것에 귀가 얇은 남편이 그걸 보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 이후부터, 남편은 그 할아버지를 롤모델로 삼고, SAT(미국 대학 수학 능력 평가)를 봐야 하는 미국 고등학생들에게 무료수학 지도를 해준다. 그중에는 결과가 좋아서 이득을 본 친구들이 많다.

지금도 남편은 나에게 '수학정석'에 나온 수학 문제를 하루에 하나씩만 풀자고 조르기를 시전 한다. 아이고, 나는 아니올시다! 하지만, 요즘 주식공부를 조금씩 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머리를 써서, 공식으로 계산을 하라고 하면 벌써 머리에 쥐가 나지만, 그래도 주식 그래프는 그래도 그림이니 좀 이해할만하다.

어쨌든, 나의 치대 입학 준비의 시작은 수학 때문에 난관에 봉착했었다. 수학이 이렇게 나의 발목을 잡을 줄이야. 고등학교 때,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영어만 필요하다고 하셨던 영어 선생님의 말씀은 진실이 아니었다고 반박해본다. 물론 영어공부를 무던히도 안 하던 친구들에게 일침을 가하기 위해 하셨던 말씀이었겠지만, 순수한 나는 그 말을 맹신하고 수학을 포기해 버린 나 자신을 합리화시켰다. 에이! 못났다! 어떤 과목이든 포기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수포자는 수복자에게서 어제도 오늘도 많이 배워가며 산다. 포기하지 말고 정복하라고.



 

이 글은 브런치 작가 시애틀 닥터오 님이 제공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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