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믿는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오늘날 과학과 이성의 발전으로 인공지능까지 등장한 시대에 교회가 영성의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설 자리를 잃어 버리게 될 것이다. 지성을 가진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을 영성이라고 한다. 교회는 이런 관계 맺음으로 생겨난 하나님의 가족을 의미한다. 우리 인간은 이런 끊을 수 없는 가족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관계를 배움으로 성숙한다.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관계를 통하여 인간 회복, 구원의 길을 보여준다. 신약 성경은 이런 역동적인 관계를 핼라어로 ‘코이노니아’라고 했는데 교회가 제도화 되면서 그 단어의 뜻을 잃어버렸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동체의 틀로 하나님의 나라와 성경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진그들은 예수님으로 부터 새로운 해석의 말씀을 들으며 소통하고 교제하는 코이노니아로 하나님의 나라를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 리더십이 되기 위한 패러다임 시프트 교육이었다. 그들은 오순절 약속하신 성령 강림 후에 자신들이 받은 교육이 이런 공동체를 위한 준비였음을 알게 되었다.
로마가 그리스도 신앙을 공인하고 국교화 하면서 사랑의 관계는 조직과 제도로 대치되었다. 그리고 교회에도 세상과 같은 통치자 교황이 등장했다. 제도와 법은 인간이 합리적으로 질서있게 살기 위하여 만들어낸 틀이지만 사랑과 관계를 담아내는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선택하신 것도 새로운 관계의 이스라엘 공동체를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교회는 오랫동안 조직과 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교회 성장이란 말도 거부감 없이 써왔다. 요즘들어 성장에 대한 반성과 함께 건강을 말하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조직화된 교회는 커지면 커질수록 자기모순에 빠지고 부패하고 타락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지만 그 반대로 살게된다. 신자들이 오래 교회를 다녀도 생각의 틀이 좀처럼 바뀌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머리로만 믿을 뿐 삶으로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이루어놓으신 그 관계가 무엇인지 공동체 안에서 배울 때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된다. 제도와 법은 육신에게 필요하지만 영혼에게는 소통과 관계가 필요하다. 그것을 모르면 누구든 언제든지 십자가와 원수로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온통 법과 제도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상식화된 세상에서 교회도 그처럼 조직화, 제도화 되는 것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관계회복과 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위하여 명목적인 법과 제도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기 때문이다.교회의 조직과 제도는 단순하게 하고 그 규모는 정관이나 법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에서 분가 혹은 증식이 필요하다.
정말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가?
먼저 이름없이, 빛도 없이 소그룹 속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라.
제 생각엔 종교가 없어지면 평화는 자연적으로 찾아 오지요..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