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만추의 거리 시애틀

작성자
KReporter3
작성일
2022-09-19 18:07
조회
182

한쪽 보조개가 들어가게 씨익 미소 지으면서 오늘만 살 것 같은 그 남자에게 시애틀은 어떤 도시였을까. 선선한 바람이 이마를 스치는 오후, 시애틀 거리를 걷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애틀이 어쩌다 한번 들르게 된 도시에서, 한 시절 삶의 가장 빛나는 시간을 채웠던 도시가 되기까지 만추는 내 선택의 소소한 기준이 되었다. 


 


시애틀은 서로 다른 모습을 위화감 없이 담고 있는 도시이다. 이 무해한 양면성은 여행자들을 헷갈리게 하고 때로는 묘한 매력으로 시애틀을 떠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시애틀은 우울하면서도 밝고, 털털하면서도 예민하고, 다정하면서도 차갑고, 떠들썩하면서도 깊은 고요를 드리우고, 폐쇄적이면서도 개방적이고, 점잖으면서도 화려하다. 시애틀의 분위기는 그래서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다. 음악과 와인과 커피, 스타벅스와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와 아마존, 카페와 레스토랑과 박물관과 와이너리, 호수와 바다와 산. 시애틀만이 가질 수 있는, 가질 자격이 있는 이 모든 장소와 유무형의 예술과 향기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도시를 완성한다.   


 


가을이 서서히 무르익어 깊고 깊은 늦가을의 시간으로 가는 동안 나는 내내 ‘만추’의 그림자를 밟고 서 있었다. 거리를 걷다가, 운전을 하다가,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가 우연처럼 툭툭 이 영화가 떠올랐다. 애초에 시애틀과 만추는 세트로 내게 주어진 선물 상자 같은 것이었다. 나는 오래된 카페에 앉아 아무도 위로해 주지 않는 그 남자를 떠올리고는 ‘그러니까, 도대체 이 남자는 누가 위로해 준단 말인가’ 한탄과 안타까움을 내뱉곤 했다.     


 


이 영화에서 더 안타깝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쪽은 남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위로하고 여자가 매몰차게 밀어낼 때도 곁을 떠나지 않는다. 애나의 손목에 자신의 시계를 채워주는 훈은 그렇게 자신의 시간을 나눠 준다. 그들이 견뎌내야 할 그리움은 안개 자욱한 도시에서 유령처럼 떠돈다.       


 


영화는 훈의 과거에는 한없이 불친절하다. 다만, 훈의 아슬아슬한 현재의 상태만 보여준다. 반면에 애나의 경우 그녀의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미래까지도 들여다보인다. 그래서 탕웨이의 만추와 현빈의 만추는 다른 결의 색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배우 현빈은 시나리오에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지며 고민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훈은 ‘자신을 감추고 상대방에게 문을 열어주는 캐릭터’이다. 불안과 쓸쓸함을 감추고 귀엽고 시시껄렁한 모습으로 시애틀 거리를 걷는 그의 뒷모습은 그래서 더 슬프다.       


 


여백이 많은 시나리오를 섬세한 연기와 열정으로 채운 배우들이 있어 이 영화가 더욱 빛난다. 영민한 배우들은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으면서도 감정과 눈빛을 절제했다.         


 


시애틀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위드비 아일랜드에 들렀을 때, 놀라운 데자뷔의 장면이 펼쳐졌다. 그날은 영화처럼 안개가 자욱했고 사방은 조용했으며 모든 것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애나가 서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서서 회색빛으로 뒤척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상상과 현실이 뒤섞였고, 오래된 감정들은 흩어졌다.      


훈의 미래를 알 수 없었기에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후에도 한참을 먹먹했다. 그래서 영화가 개봉한 후 무려 십 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훈의 불안한 미래를 상상하게 된다. 훈은 한 번쯤 이곳에 왔을 것이다. 나처럼 애나가 서 있었던, 마지막 키스를 나눴던 그 장소에서 쓸쓸하고 아득한 뒷모습을 보이며 서 있었을 것이다.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어쩌면 정말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안개보다 더 막막한 불안이 앞을 가렸다. 그리고 조금 울었던 것 같다. 같은 장소,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나는 한없이 가여운 그 남자를 떠올렸던 것일까. 아니면 홀로 카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그 여자를 떠올렸던 것일까.      


 


몇 번 위드비 아일랜드에 갈 때마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 파랗고 투명한 하늘과 마주했던 터라 그날, 나는 당황했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안개는 필연적으로 걷힌다는 사실을. 안개는 섬세한 장치였고 각인된 그리움을 해제하는 열쇠였지만, 나의 삶과 그들의 삶에 반복적으로 서늘한 아픔을 드리울 것을.      


모든 절망과 후회와 한숨 속에서도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시애틀은 담담하게 그들을 품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말한다.      


 


훈은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시애틀이, 위드비 아일랜드가, 얼마나 눈부시게 반짝이는지. 봄날의 따스한 햇살, 여름날의 싱그러운 나뭇잎, 가을날의 투명한 하늘, 이 모든 것들이 우연처럼 우리를 찾아온다는 것을.      


 


삶이 질척이고 힘들 때마다 그곳을 기억하며 반짝이는 시간을 끄집어낸다. 이제는 키스톤 카페도 이름이 바뀌고 벽에 걸려 있던 만추 영화 포스터도 사라졌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 그 가을날의 순간들은 깊이 남아 있을 것이다.      


 


어떤 시간들은 천천히 스며들어 잊히지 않는다.       


 



 


이 영화리뷰는 정서진 님이 제공해주셨습니다. (brunch.co.kr/@c488e79453924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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