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셈블리로 본 국회] 명대사에 투영된 '씁쓸한 대한민국 정치'
최근 종영한 KBS 정치 드라마 어셈블리는 5% 안팎의 저조한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여의도 정치권에서 명품 드라마로 호평 받으며 회자됐다.
드라마는 조선소 용접공 출신 해고자가 복직투쟁을 벌이다 엉겁결에 보궐선거를 통해 여당 국회의원이 된 정치역정을 담았다. 국회에서 많은 분량이 촬영됐고,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의 드라마 작가가 각본을 써 현실감이 살아있다.
어셈블리는 특히 명대사로 화제가 됐다. 명대사 속에는 우리 정치현실 속 자화상이 담겨 있었다. 국민은 도외시한 채 권력만을 향해 무한충성하는 정치권의 모습은 현실과 너무 닮아 씁쓸함을 자아내기도 했다.
◆ 결정 못하는 국회, 골치아픈 갈등 사안은 모두 사법부로?
"왜 우리에게 미안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인공 전상필(정재영 분)이 법정에서 판사에게 외친 한 마디다. 해고 노동자인 주인공 진상필은 해고 무효 소송에서 1심 승소, 2심 패소 후 최종심인 3심에서 패소할 위기에 처하자 이렇게 울부짖는다.
진상필은 우리 법을 '호떡'에 비유하며 "호떡 구울 때도 한 번만 뒤집지, 두 번은 안 뒤집거든요! 대한민국 법이 호떡만도 못 합니까!"라고 일갈했다. 또 정치인들을 향해서는 "법을 개떡 같이 만드니까 판사들이 호떡 같이 뒤집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해고, 사내 하청 등 기준이 법에 명시돼 있지 않아 자의적 해석의 여지가 크기 때문에 '입법 미비'라는 비판이 나오는 현실이 투영된 대사다.
이 명대사는 정치가 점점 왜소해지는 현상도 꼬집는다. 부당 해고를 당하는 등 억울한 일이 생기면 이제 '정치(국회)'가 아닌 '사법부'를 찾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법으로 해결하자'는 말이 상식처럼 통용되는 것이다. 법을 만드는 국회가, 정치가 제대로 역할을 못하니까 통상임금 문제나, 현대차 사내 하청 노조 문제, 심지어 김영란법(위헌소송)까지 사법부에서 판단하게 됐다.
◆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빌어먹을 해고, 당해보는 게 소원"
김규환(옥택연 분)은 친구들과 취업이 되지 않는 슬픈 현실을 탓하며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다 진상필과 시비가 붙는다. 해고 노동자로서 노조의 상징인 빨간 조끼를 입고 있는 진상필을 비웃다 싸움이 벌어진다.
"너희들이 해고가 뭔지는 아냐"고 발끈하는 진상필에게 김규환은 이렇게 말한다. "해고 그거, 우리 같은 놈들한테는 소원이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빌어먹을 해고, 당해보는 게 소원이다."
2015년 대한민국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정부여당이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 중인 노동개혁의 핵심은 임금피크제의 전면 도입을 통한 청년 일자리 창출이다. 쉽게 말해 아버지의 일자리를 자식에게 나눠주자는 주장이다. 좋은 일자리는 한정돼 있는데 사람은 차고 넘친다. 정치는 아직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 내지 못하고 있다.
김규환은 이후 국회에 보좌진으로 입성해 패자들을 위한 두 번째 기회 지원법을 만든다. 해고자, 실업자가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하는 내용의 법안이다.
◆ "크레인에 떼 쓰러 올라갔다고? 그 사람이 거기까지 올라간 진짜 이유는..."
김규환의 꿈은 경찰이다. 경찰 시험에 합격해 제복을 입고 해고 노동자인 아버지(배달수)를 찾아가는 게 꿈이다. 그런 그는 경찰 시험의 최종 단계인 면접 시험날 부당한 해고에 항의하던 아버지가 크레인에 오르다 미끄러져 운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아버지의 부음(訃音)을 뒤로 한 채 면접장에 간 김규환은 '노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면접관의 질문을 받는다. 같이 면접에 들어간 다른 지원자는 "크레인에 떼 쓰러 올라건 건 잘못됐다"고 말한다.
김규환은 "저도 모범답안이 있긴 하다. 그런데 그걸 말하면 저는 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러면서 그 지원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크레인에 떼를 쓰러 올라갔다고? 그렇게 보이겠지. 그 사람이 거기 올라간 진짜 이유는 땅바닥에서 더 이상 발 디딜 곳이 없었기 때문이야. 거기 밖에 올라갈 데가 없어서." 피맺힌 절규다.
국회 앞에는 늘 무언가에 항의하기 위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정작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국회의원은 거의 없다. 이들 오히려 점점 국회에서 멀리 밀려나고 있다. 16대 국회 때부터 보좌진 생활을 해온 야당 소속 한 보좌관은 "국회나 여야 당사를 찾는 국민들이 너무 줄었다"며 "정치가 이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는 방증"이라고 지적했다.
드라마에서 진상필은 사무총장 수락 연설을 하며 동료 의원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비리 사장 때문에 월급을 못 받은 직원들이 매일 국회 앞에서 천막 농성을 하는 사실을 아냐고 물으며 한 말이다. "알 턱이 있나. 만날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정치공학을! 그러니까 우리 눈 앞에서, 우리 코 앞에서, 그렇게 불쌍한 사람들이 만날 울고 있는 것을 못 보고 있는 것 아녜요, 여러분이."
◆ "왜 부자를 돕는 건 투자라고 하고, 가난한 자를 돕는 건 비용이라고 합니까"
진상필은 룰라 브라질 전 대통령의 말을 인용해 우리 사회에 패자부활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패자를 위한 법, 한 번 실패해도 다시 기회를 주는 법을 만든다. 일명 '배달수법', 해고 노동자로서 해고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 크레인에 오르다가 미끄러져 목숨을 잃는 동료의 이름을 딴 이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서 동료 의원들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국민들은 뼈 빠지게 일하고 나라 지키고 세금도 냅니다. 그게 국민의 의무라고 헌법에 나와있으니까. 배달수씨도 그래요. 평생 뼈 빠지게 배만 만들고, 군대도 갔다 오고, 갑근세(甲勤稅·근로소득세)도 꼬박 꼬박 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길거리로 내팽겨쳐 졌어요. 그 사람 누가 일으켜줘요? 국가입니다. 바로 국가입니다.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는 게 국가의 의무니까."
"국민들이 호구도 아니고 물주도 아니에요. 국민들은 이 국가의 주인입니다. 그래서 저는요. 국민들에게 믿게끔 해주고 싶어요. 국가가 나를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고, 국가가 내가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도움을 준다고. 그래서 나는 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에서 내가 앞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드라마는 이런 대사로 마무리 된다. "지옥같은 세상을 신이 아닌 인간의 힘으로 구원하려고 만든 게 정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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