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시

케이시애틀 연재 에세이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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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정착기 두번째

에세이
에세이
작성자
국창선
작성일
2007-01-12 21:14
조회
2853
‘사람 따라 시간 따라’…분통 터지는 제멋대로 규정



미국에서 집을 얻기란 참으로 지난한 과정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이방인에게는 자꾸 얼마 전까지 살았던 모국과 비교하는 버릇이 생겨서 일겁니다. “어디라면…”은 신참자에게 드는 당연한 가정이지만 적응하는데 ‘첫째가는 적’이라는 것을 이내 알았습니다.

이곳에 도착한 지 4일만인 지난해 11월 27일, 당분간 얹혀살게 허락해준 분과 함께(언어소통이 안되므로) 페더럴웨이의 한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찾았습니다. 더부살이에서 금새 해방(?)될  것이라는 소박한 꿈을 안고 갔습니다.

가는 동안 입주 신청을 하고 기다리는 등의 임대과정을 들었습니다. 떨떠름했습니다. “아니, 집이 있으면 곧바로 짐싸서 들어가면 될 일이지, 신청서(Application) 내고 마음 졸이며 OK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건 또 뭐야. 제 돈 쓰면서…. 참!” 당장 한국을 생각했습니다. 기대가 조금 누그러지기는 했어도 길어봤자 하루 이틀이려니 하고 애써 위로를 했습니다.

금발의 앳된 여직원은 반갑게 맞으면서 입주 후보지로 2군데가 있으니 함께 둘러본 뒤 맘에 드는 곳을 일러달라고 했습니다. 다시 기대가 솟았습니다. 다만 사회보장번호(SSN)가 신청했는데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말에 살짝 실망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그 귀여운 아가씨는 이틀 안으로 OK 여부를 알려줄 것이니 그때 신청서류를 작성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그때까지도 OK만 하면 당장이라도 짐싸들고 들어갈 요량이었습니다.

하루, 이틀….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아니, 평소 듣던 선진국 미국의 모습이 이런 건가. ‘코리안타임’을 들먹이며 지네들은 철두철미하게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처럼 방정을 떨더니….” 그래도 점잖게 하루를 더 기다려 보기로 했습니다. 역시 별무신통. 슬슬 부아가 솟았습니다.

곁에선 그러더군요. “여기 얘들, 약속 안지켜요. 시간낭비 말고 먼저 연락해보세요.” 확 깼습니다. 마음은 움직였지만 그래도 점잖은 체면에 일단 주말까지 기다렸습니다.

더 볼 것이 없었습니다. 주말이 지나고 씩씩대고 ‘통역’을 대동하고 찾아갔습니다. 심기가 무척 불편했지만 가까스로 진정하고 다른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 한 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습니다. 자기는 모른다는 듯 양손을 벌리는 특유의 표정을 한 채 누구에게 말했느냐, 접수된 서류가 없다는 게 돌아온 간단한 답입니다.

“아! 이럴 수가.” 말인즉슨 맞습니다. 직원 말만 믿고 서류접수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역만리 먼 땅에서 온 이방인이 사무소 직원 말을 믿지 않고 누굴 믿겠습니까. 귀염둥이 금발의 소재를 물었더니 휴가라 방금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아뿔싸! 그 귀염둥이는 관리사무소에 들어오면서 스쳐지나갔습니다. “고객과 약속도 지키고 않고 만난 근거도 남기지 않은 주제에 씩 웃고 가다니….” 무책임한 직업관이 미국인의 본질인지 의심스럽습기도 했지만 불쾌한 심기를 달래며 서류를 억지로 작성했습니다.

아직까지는 ‘금세 입주’라는 부푼 꿈을 깨뜨리지 않은 채 곧바로 신청에 필요한 머니오더도 끊어 잽싸게 제출했습니다(물론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것 역시 기가 차더군요. 330달러를 신청비와 보증금(Deposit)조로 받는데 심사비 30달러는 신청이 기각돼도 돌려주지 않고(말 그대로 심사비!), 입주하더라도 300달러는 이 명목 저 명목을 들어 돌려주지 않을 돈입니다(거기다 머니오더 수수료까지)). 일단 돌아와서 기다렸습니다.

연락한다는 날짜까지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이번에는 기다릴 것도 없이 쌩하게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사과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며칠 뒤 오라며 끊습니다. 한국에서 그랬다면 그 직원은 바로 ‘아웃’됐겠죠? 고객을 뭘로 보고…

어쨌든 정해진 날 세 번째 갔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황당한 얘기가 날아듭니다. SSN이 없으니 거의 7개월치를 당장 내놔야(Deposit) 들어올 수 있다는 겁니다. “처음에 별 문제 없을 거라 했고, 두 번째 방문에서도 전혀 그런 얘기가 없더니….”

왜 말이 사람 따라, 시간 따라 다른지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말이 통해야 말이죠. 나중엔 짜증스러움이 겹쳐 자포자기한 채 “맘대로 하세요.”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습니다. 직원의 말은 이어졌지만 귀에 들어올 리 없었습니다. “개인수표(check)는 안되고…, 어쩌구 저쩌구….”

아, 이렇게 해서 아예 기대를 하지 않게 만드는 방법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왜 있잖습니까. 늑대와 소년의 우화처럼 거짓말이 되풀이되면 아예 기대를 하지 않는 심리 말입니다. 오자마자 학습효과를 친절하게도 터득케 해주네요. 전 이제나 저제나 하다 결국 제 풀에 지치고 만 셈입니다.

“OK…OK….” 마음을 비운 뒤 오케이를 연방 외쳤습니다. 사실 마음을 비운 게 아니라 어쩔 도리가 없는 거죠. 말도 안통하고 거래관행도 모르니 말 입니다. 설사 관행을 알아도 미국이 그렇다는데 어쩔 겁니까.

힘겹게 입주 날짜가 정해졌습니다. 12월 9일. 거의 2주 동안 5차례나 찾아가 관리사무소와 실랑이 한 끝에 결국 입주를 마쳤습니다. “참~ 나. 내 돈 내놓고 큰 소리 한번 못치다니….” 미국의 첫 모습은 입맛을 다시게끔 했습니다.

과거 취재차 수차례 미국 전역을 돌아봤지만 실제 생활과 떨어진 채 수박겉핥기식으로 보고 간 터라 이제야 미국의 진짜 모습이 어떤 것인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마음속에 허상을 심어놨을까요?

- 미디어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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