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내가 사는 곳이 꽤 알려져 있구나... 하는 걸 느낄 때들이 있습니다. 시애틀이라는 도시를 사람들이 잘 알지 못했습니다만, 이 도시가 영화 '시애틀의 잠못이루는 밤' 이라고 소개된 탐 행크스와 멕 라이언의 영화 이후로 조금조금씩 한국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었습니다. 또 APEC 정상회담 때 시애틀의 블레이크 아일랜드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비롯한 정상들이 한 자리에 모임으로서 시애틀은 이름을 크게 알렸던 것 같습니다. 

1999년 12월, 시애틀은 이른바 '반세계화의 상징'으로서 다시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WTO 체제가 결국 자본의 통제 없는 흐름을 가능케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를 박살낼 것임을 직감한 세계 농민 단체들과 각종 직능 단체들, 그리고 세계화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회의 자체를 실력으로 무산시켜 버렸습니다. 시애틀은 이때 반세계화 운동의 상징 도시가 됐습니다. 약자들에게는 연대의 이름으로, 그리고 가진 자들에겐 저항이 보여줄 수 있는 두려움으로 기억되는 도시가 됐던 것이지요.

한국에서 시애틀은 여러가지로 기억되는 모양입니다. 박재범이라는 가수 때문에도 그렇고, 또 시애틀이 배경이 되어 나왔던 만추라는 영화도 시애틀이란 도시를 말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매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스페이스 니들의 도시, 그리고 무엇보다 '스타벅스'라는 이름을 말할 때 시애틀은 특별한 도시가 됩니다. 커피 향 가득한 도시, 비의 도시. 시애틀이 갖는 어떤 상징성입니다. 보잉, 마이크로소프트, 그리고 커피... 그리고 요즘은 '이대호'라는 이름이 시애틀을 떠올리게 하는 모양입니다. 

시애틀 매리너스의 상징이 한때는 교타자 이치로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애틀 팀을 떠올리면 '슬러거 이대호'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늘었습니다. 직장에서도 "대이~호우" 라고 말하며 원더풀을 말하는 친구들이 꽤 있습니다. 그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다들 압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도 듣습니다. "한국, 원래 야구 잘 하잖아." 아, 그랬었나? 너희들에게 한국은 '원래 야구를 잘 하는 나라'였나? 언제부터? 

무엇인가의 상징이 되어 버린 도시. 그 말은 역사가 깃들어 있다는 말이지요. 사람이 기록을 남기고 나서 지나간 시간들은 다 역사가 되어 버렸지만, 그중에 굳이 어떤 의미를 부여할 정도의 것이 있다면, 그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뒤돌아봐야 할 의무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미국에서 제일 격렬한 노동운동이 있었고, 제일 격렬한 민족운동이 있었던 곳이 바로 이 시애틀입니다. 그리고 그런 운동에 대해 가장 잔인한 진압을 했던 곳도 이곳입니다. 에버렛의 노동운동에, 시애틀에서의 중국인 쿨리들의 추방 반대시위에, 이곳의 권력자들은 대포를 쏘아가며 진압을 했습니다. 거리엔 피가 강이 되어 흘렀고, 시신이 산이 되어 쌓였었습니다.

오늘날 시애틀이라는 도시가 갖는 개방적이며 합리적인 이미지는 이런 잔인함을 반성하고, 그 과거에 대해 철저히 인정하고 사죄하는 과정을 딛고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유럽에서의 똘레랑스가 같은 기독교인들끼리의 배척과 살육을 반성한 자리에서 꽃피었듯이. 

미국의 각 도시가 사실은 이런 과정을 겪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 각자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의 의미가 부여됐는지, 그것을 꺼내어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의 일상을 지켜내야 한다는 것.

요즘 제가 하는 생각을 적지 않은 미국인들도 새롭게 되새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선택이 우리의 일상을 갑자기 드라마틱하게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버니에 대한 열정적인 지지도, 트럼프에 대한 지지도 사실은 이 신자유주의적 일상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고, 그것은 기존 정치에 대한 회의와 불신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트럼프의 약진은 자기들이 예전에 어렵게 극복했던 역사를 다시 전면으로 끄집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져다 주는 거지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요즈음.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