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무싸 :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증명을 요구받는 서글픈 운명을 타고났다.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해도 괜찮은지, 나의 삶이 누군가에게 혹은 이 사회에 티끌만 한 쓸모라도 있는지를 확인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다정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이룩한 문명과 시스템은 시간이 갈수록 거대해지고 정교해지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을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생채기 내기 일쑤다.
얼마 전 고국에서 치러진 지방선거가 남긴 풍경도 이와 다르지 않다. 선거가 끝난 자리는 언제나 그렇듯 아물지 않은 감정의 앙금과 승패에 따른 거친 후유증으로 어지럽다. 서로를 향해 쏟아내던 날 선 언어들은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가볍게 건너와 이곳 미주 한인사회에까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단체 대화방에서는 좌와 우, 진보와 보수라는 해묵은 이념의 잣대로 서로를 가르고, 동포들이 모이는 소박한 자리마저 고국의 정치 지형을 복사해 놓은 듯 소모적인 논쟁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곤 한다.
그러나 컴퓨터 모니터를 끄고,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을 돌려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삶의 현장을 바라보는 순간, 풍경은 완전히 다른 무게와 현실감으로 다가온다. 주유소의 기름값 계판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는 아침, 마트 계산대에서 빼곡히 찍힌 영수증을 받아 들고 잠시 손끝을 멈칫거리는 저녁. 끈질기게 이어지는 고물가와 고유가의 서슬 퍼런 파고 속에서, 평범한 이민자들의 삶은 하루하루가 그 자체로 치열한 생존 서바이벌이다. 이 가혹한 민생의 현실 앞에서, 저 멀리 텔레비전 속 정치인들이 벌이는 화려한 말잔치와 좌우의 진흙탕 공방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실질적인 의미가 있을까. 그것이 오늘 밤 우리 집 식탁 위에 드리운 근심을 단 1달러어치라도 덜어줄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뼈아프게 잘 알고 있다.

문득 최근 넷플릭스에서 방영되어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던 드라마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극 전체를 관통하는 명대사이자 작품의 본질이었던 문장,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선언이다.
화면 속 인물들은 세상이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기준과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번번이 좌절하고, 잘나가는 타인들의 틈바구니에서 깊은 소외감을 느끼며 저마다의 고독한 사투를 벌인다. 이 드라마가 수많은 현대인의 눈시울을 붉히고 격렬한 공감을 자아냈던 이유는, 그것이 어떤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숨겨진 자화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시대는 어느 때보다 풍요롭지만, 동시에 어느 때보다 자주 인간의 ‘쓸모’를 가혹하게 심판하는 시대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인공지능(AI) 기술은 인간의 오랜 노동을 가치 없는 것으로 대체해가고 있으며, 골목마다 들어선 디지털 키오스크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은 기계에 서툰 누군가의 손짓을 매정하게 거부하며 그들을 세상의 바깥으로 밀어내고 있다.
이 보이지 않는 전쟁은 특정 세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극심한 취업난과 사회적 경쟁 속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스스로를 ‘전업 자녀’라 자롱하며 집안으로 숨어버린 서글픈 청년들의 이면에는 무가치함과의 눈물겨운 사투가 있다. 평생을 성실함 하나로 가족을 부양하고 사회를 지탱해 왔으나, 이제는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문법을 배우지 못해 자식들의 눈치를 보며 서성이는 시니어들의 가슴 속에도 깊은 소외감과 무력감이 응어리져 있다. 더욱이 이국땅 미국에 건너와 언어의 장벽을 넘고, 문화적 낯설음을 견뎌내며 매일 새벽 가게 문을 열어온 우리 한인 이민자들에게 이 불안은 더욱 치명적이다. 내가 평생 일구어온 삶의 터전이, 그리고 내 존재가 혹시나 이 거대한 미국의 주류 사회 속에서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근원적인 공포가 우리를 엄습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짜 두려워하고,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하는 본질은 결코 정치적 이념의 승패가 아니다. 정권이 바뀌고, 어느 당의 후보가 당선되는가 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는 공포, 즉 거대한 세상의 변화와 가혹한 경제적 위기 앞에서 나와 내 가족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본원적인 고독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정치는 이 본질적인 외로움과 고단함을 다정하게 돌보는 대신, 오히려 우리 마음속에 도사린 불안과 공포를 자양분 삼아 세상을 더 잔인하게 편 가른다. 네가 틀렸고 내가 옳다는 식의 좌우 공방은, 당장 내일의 렌트비와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민생의 고통을 가리는 자욱한 안개에 불과하다. 이념의 깃발을 높이 든 이들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정작 위로받아야 할 평범한 인간의 존엄성은 설 자리를 잃고 만다.
이제 우리는 질문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좌와 우의 칼날을 서로에게 겨누며 피 흘리는 이 싸움이 도대체 우리의 삶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우리가 진짜 힘을 모아 싸워야 할 진짜 적은 내 이웃의 다른 정치 성향이나 고국의 정당이 아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작아지게 만들고, 서로를 불신하게 하며, 끝내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믿게 만드는 ‘무가치함이라는 거대한 괴물’이다. 그리고 이 괴물과의 싸움은 결코 홀로 치러낼 수 없다. 각자 도생의 칼날 위에서는 모두가 패자가 될 뿐이다.
드라마 속 인물들이 마침내 평온을 찾았던 순간은, 그들이 대단한 사회적 성공을 거두거나 세상의 기준을 바꿨을 때가 아니었다. 벼랑 끝에 선 서로의 멍든 상처를 알아보고, 부끄러움을 무릅쓴 채 나지막이 “나를 좀 도와줘”라고 손을 내밀 때였으며, 그 손을 거두지 않고 맞잡아준 이웃의 연대가 있었을 때였다.
지금 우리 미주 한인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 역시 바로 그러한 다정한 시선과 공동체적 연대다. 마트 계산대 앞에서 스마트폰 결제가 서툴러 쩔쩔매는 시니어의 뒷모습을 다정한 인내로 기다려주는 마음, 고물가와 고유가라는 가혹한 계절을 지나며 서로의 어깨에 지워진 짐을 조금씩 나누어 지려는 배려, 그리고 무엇보다 거친 이민의 삶 속에서 지쳐버린 서로의 등을 토닥이며 “당신은 여전히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고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절실하다.
정치의 소란스러운 소음으로부터 잠시 귀를 닫고, 곁에 있는 내 이웃과 가족의 지친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홀로 눈물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고귀한 영혼들이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숫자로 채점하고 쓸모로 재단할지라도, 우리가 서로를 향한 위로의 끈을 놓지 않고 든든한 연대의 울타리가 되어준다면, 세상이 던지는 그 어떤 무가치함의 침묵도 결코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광야 같은 이민의 삶을 버텨내게 하는 것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내 곁의 사람을 향한 작은 다정함이다.
- 글쓴이 LaVie
- 전 금성출판사 지점장
- 전 중앙일보 국장
- 전 원더풀 헬스라이프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