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시

케이시애틀 연재 에세이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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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실력의 한계와 연이은 시도들

에세이
작성자
KReporter3
작성일
2022-11-22 23:43
조회
389

될 때까지 하는 영어 회화 도전기 (7)

 

실기 시험이 끝난 후 얼마 되지 않아 2012년 5월이 다가왔다. 매년 5월에는 근무지를 옮길 수가 있었는데, 큰 조직에서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에 심신이 지쳐서 새로운 환경으로 이동을 해보고 싶었다. 나는 고심 끝에 근무지 이동 신청을 하여 포천에 있는 한 보건지소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보건지소에서는 교도소와는 다르게 진료가 많지 않아 남는 시간에는 틈틈이 공부를 할 수 있는 여유시간이 생겼다. 미국에 가려면 남은 2년 동안 두 번의 시험을 더 치러서 고득점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실기 시험을 준비했던 때와는 다르게 필기 공부는 지루하고 집중이 되질 않았다. 한적한 시골마을에 혼자 있으니, 근무가 끝나고 나면 동네 산책을 하거나 시골 강아지, 길고양이들하고 놀면서 시간을 보내었다. 묶여있는 시골 강아지들은 몇 차례 먹이를 주자 어느덧 나를 알아보고 지나갈 때마다 나와서 꼬리를 흔들어주었다. 미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점차 희미해져 갔고 결국 나는 시험공부를 포기하기로 하고 근처 피아노 학원에 등록을 하였다. 간절함이 없는 상태에서 억지로 공부를 하는 것이 힘들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시골 생활은 마음이 편하기는 하였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기에는 지루하였다. 특히 밤이 되면 보건지소 건물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이 외롭게 느껴졌다. 영어공부 겸 취미생활 겸 가벼운 마음으로 미국에서 사 온 스펀지 밥 DVD를 보며 시간을 보내었다. 처음부터 자막이 없이 보면 알아듣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자막을 켜놓고 보다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다시 자막이 없이 보기를 반복하였다. 나는 아직 듣기를 반복해서 소리에 익숙해져야 귀가 뚫린다는 영절하 이론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다 보면 실력이 자연스럽게 늘 것으로 기대하였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내용을 정확히 모른 채 소리에만 집중하면서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보는 것은 여간 지루한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집중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져 이어폰만 귀에 꽂고 다른 일을 하거나 아예 듣다가 잠이 들어버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는 별 도움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방법을 바꾸기로 하였다. 영절하에서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지 말라고 강조하였지만, 역시나 나라는 사람은 그렇게 마법 같은 방법으로 손쉽게 무엇인가를 얻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인터넷에서 대본을 구하여 출력을 한 다음 읽어보면서 모르는 단어와 표현들을 먼저 정리를 하였다. 그 후에 어느 정도 내용이 숙지가 되고 나서 다시 듣기를 반복하였다. 뜻을 알기 전보다는 확실히 나아졌지만,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듣는 것은 여간 지겨운 일이 아니었다. 역시나 같은 내용을 듣다 보면 졸음과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효율성이 극도로 저하되는 것이 느껴졌다.


영어 리스닝을 계속하면서 느낀 것은 들리는 건 들리고 안 들리는 건 여전히 안 들린다는 사실이었다. 잘 들리지 않는 부분은 영상을 멈춰놓고 대본을 보며 몇 차례 따라 읽기를 반복하고 나서야 소리가 잘 들리게 되었다. 내가 따라 말할 수 있고 뜻도 알아야 리스닝이 더 잘 된다는 것을 깨닫고 영어 자막을 보며 따라 말하기를 시작하였다.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따라 말하기를 계속하니 집중도 잘 되고 시간도 더 잘 갔다. 내가 능숙하게 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연습한 말은 문장의 앞 내용을 들으면 뒤에 따라올 말까지 머릿속에 떠오르게 되었다. 이렇게 미드나 영화, 애니메이션 등의 대사를 따라 말하는 방식이 스피킹, 리스닝 향상을 위해 최근 많이 활용되고 있는 쉐도잉이라고 한다. 계속 쉐도잉을 하면서 원어민의 발음을 따라 하다 보니 발음만큼이나 강세가 중요하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미국에 갔을 때 원어민의 발성이 깊게 느껴졌던 것을 떠올리면서 소리가 목보다는 가슴 깊이에서 저음으로 올라오게 하려고 노력하니 더 발음이 잘되기도 하였다.


쉐도잉을 하면서 어느덧 자막 없이 스펀지밥의 모든 에피소드를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스펀지밥으로 충분히 기본기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한 나는 iCarly에 도전할 때가 왔다고 생각을 하였다. 미국에서 iCarly를 TV로 봤을 때 주인공들의 말이 너무 빨라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스펀지밥으로 기초 실력을 쌓고 iCarly로 넘어갈 계획을 세워놨었다. iCarly는 남녀 중학생들의 일상생활 위주로 콘텐츠가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인들이 나오는 미드보다 대사의 활용도가 높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내 자신감과는 다르게 iCarly로 콘텐츠를 바꾸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말이 빨라도 너무 빠르고 대사의 길이가 스펀지밥 하고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길었다. 일반 속도로는 대사를 따라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배속을 낮춰서 쉐도잉을 하였다. 하나의 에피소드를 끝내는데도 스펀지밥과는 비교가 안되게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렇게 쉐도잉을 하면서 한 해가 지나갔고 다시 근무지 이동 시즌인 2013년 5월이 다가왔다. 쉐도잉에서 어려움을 겪자 다른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공부를 하기 더 좋은 환경을 찾아 2013년에는 김포의 보건지소로 다시 근무지를 옮겼다. 이제 나에게는 1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김포에서는 진료 시간은 포천보다 더 바빴지만, 퇴근 후에 근처 도시로 운전을 해서 이동을 할 수가 있었다. 주중에는 주 2회 일산에 있는 성인 원어민 영어회화 학원에 다니면서 쉐도잉을 병행하였고, 주말에는 강남에 있는 영어 스터디 모임을 신청하여 다녔다. 영어 학원에서는 간단한 레벨 테스트를 본 후 5-6명의 학생들을 원어민 선생님이 가르쳤다. 그동안 영어 공부를 해왔던 게 도움이 됐는지 영어 선생님이 하는 말은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다른 수강생이 칭찬해줄 정도로 영어 발음도 꽤 괜찮은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쉐도잉으로 했던 표현들이 적절한 상황에서 잘 떠오르지 않아 문장으로 말을 만들어내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고 학원 수업은 5-6명의 학생들이 한 번씩 돌아가면서 말을 하여 시간이 너무 금방 가버렸다. 영어 스터디 모임에서도 같은 문제가 반복되었다. 여전히 문장을 만들어 내는데 어려움이 많았고, 말을 할 시간이 부족하였다. 또한 나를 포함해서 같이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한국어 표현을 영어로 번역해서 말을 하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에 제대로 된 영어를 연습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 신뢰를 할 수가 없었다. 잘못된 영어가 습관으로 굳어질 것 같은 걱정이 되어 영어식 표현을 제대로 연습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계속되었다.


6개월 정도의 시간이 흘러갔고 겨울이 되자 나는 영어 학원과 스터디를 모두 그만두었다. 추워서 밖에 나가는 것이 싫기도 하였고, 이제 슬슬 병원에 인턴, 레지던트를 하러 갈 준비를 해야 했다. 돌이켜 보니 목표로 했던 영어 실력에 도달하지 못한 채 2년 반의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렸다. 앞으로 병원 생활을 하면서 5년간은 지금처럼 영어공부를 하지 못하고 바쁜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대로 아무 대비 없이 영어 공부를 중단한다면, 지금까지 해온 과정조차 의미가 없어질 것 같았다. 여태까지 영어 공부 과정을 되짚어보며 현재의 내 실력과 한계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았다. 리스닝은 분명히 전보다 많이 늘어 iCarly도 쉐도잉을 했던 부분은 90% 이상 알아듣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미드는 여전히 잘 들리지 않았고, 더 큰 문제는 리스닝과 스피킹 실력 사이의 불균형이 너무 심하였다. 내가 실제로 할 수 있는 말은 들을 수 있는 말의 10%가 채 되지 않는 듯하였다. 쉐도잉을 하는 것이 스피킹 실력의 향상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스피킹 실력을 늘리려면 내가 하고 싶은 표현이 있는 문장을 따로 추려내여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남은 5개월의 기간 동안은 그동안 쉐도잉을 해왔던 iCalry의 대본들을 살펴보며, 실제 상황에서 쓰고 싶은 표현들이 포함된 문장들을 선별하여 작은 노트에 따로 정리를 하였다. 시간이 없더라도 추려낸 문장들을 가지고 틈틈이 연습을 하면 영어 실력을 유지 또는 향상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하였다.


처음에는 노트에 영어 문장만을 추려서 적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영어 문장을 보고 그대로 따라 읽거나 외우는 것은 스피킹 실력을 향상하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는 마치 영어 노래 가사를 외운다고 그 문장을 실제 상황에서 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하면 실제 상황에서 말을 하는 것과 최대한 가깝게 스피킹 연습을 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까 생각을 하였다. 고심 끝에 노트의 우측에는 영어 문장을 적은 다음 좌측에는 그 영어 문장을 한글로 번역하여 적었다. 한국어 어순으로 의역을 할 경우 이를 보고 다시 영어 문장을 떠올리는 것이 힘들게 느껴져 영어 어순대로 최대한 직역을 한 한국어 문장을 적었다. 나중에 그 한국어 문장을 보면서 영어 표현을 떠올리는 연습을 하기 위함이었다. 노트는 한 페이지당 23줄로 나눠져 있었기 때문에 한 칸씩 띄어 적으면 총 11~12개의 문장을 적을 수 있었다. 그렇게 틈틈이 노트를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여 5개월간 100페이지짜리 노트 두 권을 완성하였다. 이때 만든 노트가 현재 브런치에 올리고 있는 회화가 되는 영어 신경망 만들기 워크북의 초기 버전인 셈이다.


 

이 에세이는 브런치 작가 정신적 자유 연구소 님이 제공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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