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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1년 살기] 해외살이가 익숙해질 즈음

에세이
작성자
walking mom
작성일
2022-12-08 20:05
조회
394

삶이란 원래 시작과 끝의 경계가 없다는 것



올해 4월 25일에 인천공항에서 LA행 비행기를 탔고, 5월 10일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밴쿠버로 오는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이제 11월 27일이 됐다.

처음 밴쿠버 공항에 첫 발을 내디딘 순간 익숙하지 않은 모든 것들에 우왕좌왕했고, 살기 위해서 필요한 핵심적인 몇 가지 계약들과 은행, 관공서 업무들과 서류 작업을 거쳤다. 잔뜩 설레면서 하루하루 호텔에서 편안하게 자고, 맛집을 찾아다니며, 밝은 햇살 아래에서 한껏 꾸미고 사진도 찍어보는 여행 같은 해외살이를 기대했지만 도착 후 현실은 그저 생존을 위한 업무의 연속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때까지도 아직 나에게 밴쿠버의 모습이 제대로 담기질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즈음의 밴쿠버는 매일매일 비가 내렸다.

바삐 아침을 시작하는 직장인들 틈에 끼여서 함께 버스를 타고 다운타운 어학원을 한 달 정도 다녔다. 10대에서 20대 중반 사이의 어린 일본인 친구들 사이좋게 지냈으며, 브라질에서 온 영어강사이자 세 아이의 엄마인 친구도 사귀었다. 한 달간의 수업이 끝났고, 빅토리아로 첫 캐나다 여행을 떠났다.

휘슬러 여행, 시애틀 여행, 토론토와 나이아가라 폭포 여행, 그리고 멕시코 칸쿤 여행과 여름의 록키 여행, 그리고 두 번째 휘슬러 여행과 가을의 록키 여행까지.

수많은 여행과 짧은 근교 여행들로 우리 가족의 캐나다살이를 빡빡하게 채워 넣으면서 최대한 ‘여행자 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애를 써왔던 것 같다.

루틴 한 일상이 고정되어버리면 자유와 새로움을 갈구하며 떠나왔건만 다시 원래 살던 곳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 것 같았다. 이미 제주에서 1년여간의 삶을 살아본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밴쿠버만큼은 절대 ‘그냥 살지는 말자’라는 확고한 나만의 신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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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정신없이 바쁘게, 또 늘 새롭게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9월이 되었고 아이가 학교에 입학했다.

자연스레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고 나서야 밴쿠버를 여실히 느껴보는 중이다.

이전과 달리 집 근처의 행동반경에서 크게 벗어나는 날이 많지는 않지만, 나름 긴 호흡을 두고 일상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주차 표지판을 구별해서 주차를 하고, 어플을 깔고 주차요금을 지불하는 것, 그리고 분리수거를 하는 것조차도 모두 너무 어렵게 느껴졌던 그때가 도대체 언제였던가 싶다. 나름 짬밥이란 게 생긴 것이다.

이제는 우리 집이 있는 밴쿠버 웨스트에서 다운타운까지는 거의 길을 다 외웠다 싶을 정도로 운전도 능숙해졌고,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 어디에 가서 살 수 있는지 검색하지 않고도 척척 갈 수 있게 됐다.

4시만 돼도 해가 지는 우중충한 겨울이지만, 그럼에도 짙은 어둠이 깔린 5시 경의 동네 산책에서 느끼는 신선한 공기에 작은 행복을 느낀다. 여전히 세 가족이 조촐하게 살고 있지만 외로움보다는 셋이서도 잘 지내는 방법을 터득해 가는 중이다. 요즘은 오히려 밴쿠버가 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 아닌가 싶은 약간의 섭섭함마저 든다.

정착과 적응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난 후의 삶은 이제 진짜 ‘삶’이 되어버린다.

때문에 더욱 부지런해져야 하고, 열심히 살아야 하며, 익숙함을 버리고 새로움을 찾는데에 따르는 귀찮음과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이것은 짧게는 일주일 살이, 한 달 살이, 그리고 몇 개월 살이와 길게는 몇 년 살이까지 거의 모든 타지에서의 삶에 해당된다.

제주살이부터 벌써 두 번째 집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아보는 경험을 하고 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낯설고 새로운 지역에서 처음부터 적응을 하며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익숙하지 않다. 그래도 그동안의 여행 짬밥과 제주살이가 약간의 자신감과 용기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다시 필요한 가재도구와 살림살이를 준비하고, 짐을 정리하고, 동네를 탐색하고, 아이가 다닐 기관을 정하고, 이곳에서도 끝나지 않는 육아와 교육을 감당해내야 하는 현실은 ‘해외 살이’를 마냥 로맨틱하고 감성 넘치는 킨포크와 같은 삶처럼 만들어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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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여전히 이 삶을 사랑한다.

비록 낯선 곳에서의 적응이 어려운 것은 변함없고, 또 시간이 흐르면 다시 원래부터 이곳에 살던 사람처럼 회귀하는 현실을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안정적인 삶을 떠나 잠시 불안정하고, 긴장감을 주는 낯선 삶에 자발적으로 들어오는 것을 사랑한다.

대학원 시절, 교육공학 과목에서 ‘교육’에 대해 정의를 내려 보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왜 이렇게 기본적인 질문을 하는지 오히려 그 질문의 의도를 더 고민하기까지 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곧바로 대답을 하려니 어렵게 느껴졌다.

그때 내가 했던 대답이자,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는 ‘교육’에 대한 나의 정의는,

‘누군가에게 제대로 교육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이 원래의 모습에서 배움을 통해 변화하고, 궁극적으로 기존의 것에서부터 다름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즉, 나에게 ‘교육’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한 인간의 변화와 다름의 발견’이다.

교육이란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고, 아니면 스스로 자발적으로 하는 자기 주도적 학습을 통해서 일어날 수도 있다. 어떤 방식이 됐든 교육을 통해서 그 사람에게 아무런 변화도 없고, 다름을 발견할 수도 없다면 그것은 교육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자발적으로 안정감을 떠나는 이 도전들은 나에게는 나 자신에 대한 교육이다.

이 교육적 시간을 통해서 나는 언제나 떠나올 때의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지금은 비록 안정적인 단계에 접어든 해외 살이지만 이 안정감 속에서 밴쿠버를 조금 더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또한 나에게는 변화다. 그리고 사실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상황일 때 사람은 더 고차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볼 수 있다. 주변의 상황이 너무 불안정하다면 마음 또한 금방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문제를 대응하거나 해결하는 일이 생겼을 때 감정적으로 변하기가 쉽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해외살이의 가장 피크타임은, 처음의 설렘과 여행하듯 신나게 즐기는 일상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일상’이 돼버린 지금이라고 생각을 한다.

한국과는 다른 집들의 형태만 봐도 신기했고, 현지 마트만 가도 재미있었던 완전한 여행자의 시선을 거둬들이고 이곳의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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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마찬가지다.

사회 초년생의 시선으로 새로운 도시, 낯선 건물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게 신기하고 새로운 사회인으로서의 삶.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모든 것을 하나하나 배워야 하는 긴장감은 여행자의 시선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 삶이 익숙해지는 순간, 마치 시작할 때의 모든 것들이 피크타임이었던 것처럼 이미 모든 것은 전혀 새롭지 않고 지루하며, 삶이란 이렇게 살다가 끝나버리는 것인가 고민을 하게 된다.

내가 처음 결혼을 했을 때도, 그리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을 때도 그랬다.

신혼살림을 고르고, 새로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 어떤 브랜드의 겉싸개와 손수건이 좋을지를 신중하게 선택하는 그 순간들은 여행자의 시선처럼 모든 게 새롭고, 흥미롭기만 했다. 하지만 결혼과 육아가 익숙해지면서 현실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은 그 시간에서 이미 끝나버린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고, 익숙한 것들 사이에 둘러 쌓인 일상은 현실이 된다. 어쩌면 내 여행의 시작도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싶다. 짐을 풀자마자 바로 다음 짐을 싸는 일들이 늘어나고, 이제는 아예 여행보다는 그 지역에 가서 살다가 오자며 시작된 해외살이를 통해서 시작과 끝이 모호한 삶의 경계를 배운다.

진짜 피크타임은 사실 가장 익숙한 현재라는 것, 그리고 새로움을 찾으려는 시도들은 다시 안정감을 찾기 위한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니 무엇이든 시작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중간에 다시 무언가에 물려버리듯 지루해하는 것을 미리 걱정할 필요도 없다. 시작과 끝이란 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시작인 줄 알았지만 끝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다른 시작이 될 수도 있다. 원래 삶이란 그런 존재이니 말이다.

오늘 나는 이 글을 마치면 따뜻한 녹차를 한 잔 마시고, 겨울에 어울리는 재즈 음악을 들을 것이다. 저녁에는 10분 정도 걸어가면 있는 귀엽고 작은 카페가 있는 사거리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고소한 우유를 한 통 사 올 것이다. 우유에 계란을 두세 개 정도 풀고, 브리오슈 식빵에 푹 적셔서 달콤한 프렌치토스트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남편과 아이와 함께 초에 불을 붙이고 1층 탁자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코코아와 함께 프렌치토스트를 먹을 것이다.

가장 안정적인 시간 속에서 나는 또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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