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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오는 날에 - 백미와 현미의 실내 생활 적응기

에세이
작성자
KReporter3
작성일
2022-11-14 20:21
조회
196

시애틀로 간 백미와 현미 (8화)

 

밖에서 지내는 백미와 현미가 유독 안쓰러웠던 날이 있다. 눈이 오는 날이었다. 백미와 현미가 와 있던 중에 내가 병원에 입원한 시기가 있었는데, 그동안 제주에 눈이 아주 많이 왔다. 다행히 우리 집이 있는 동네는 많이 오지 않았는데, 병원이 있던 제주시에는 함박눈이 쌓여서 온 세상이 하얗게 보일 정도였다. 마침 크리스마스였기에 분위기는 잘 어울렸지만 운전해서 집에 가야 하는 용이가 고생을 많이 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간병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같이 있으려고 했지만, 수술한 둘째 날부터는 혼자도 있을만해서 용이는 집에 갔고, 집에 가는 길은 눈이 많이 쌓여서 미끄럽고 힘들었지만 막상 집에는 눈이 많이 오지 않았다고 했다. 신기할 정도로 눈이 없었는데, 제주도는 그렇게 한라산을 중심으로 날씨가 많이 달라지곤 한다. 백미, 현미 그리고 보리가 걱정되어 병원에 오래 있지 않고 집에 간 것이기도 했는데, 눈이 오지 않고 덜 추워 다행이긴 했지만 그래도 밖에서 지내는 아이들이 걱정되는 건 늘 마찬가지였다. 퇴하고 나서도 눈이 몇 번 더 내렸는데, 작년처럼 많이 내려 쌓이지는 않고 진눈깨비 같은 눈이었다. 마침 귤나무에 열린 귤 색깔들과 어울려 눈 오는 배경에 하얀 개의 모습이 예쁘긴 했지만, 그날엔 백미도 추운지 집에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겨울이 깊어지도록 백미와 현미는 임보처를 찾지 못하고 마당에 있었다. 한 명이라도 임보처를 찾으면 한 명은 집 안에서 적응하며 지내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우리도 한 번에 두 명을 다 데리고 들어와 보리까지 세 명의 개들과 지낼 생각은 오랫동안 하지 못했다.

 

그런데 결심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 날이 찾아왔다. 백미와 현미를 데려온 지 오래되지 않았을 때 지인을 통해 해외 입양을 문의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1월에 연락이 왔다. 단체에서 해외 입양을 보내려고 준비하던 아이들 여럿이 파보에 걸려 출국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는데, 그 자리를 현미와 백미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장 일주일 사이에도 출국할 수 있지만 현미와 백미가 실내 생활 적응이 안 된 상태에서 바로 보낼 수는 없고, 한두 달 사이에라도 출국 계획이 잡힐 수 있으니 실내 생활에 적응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기약 없이 다섯 명이서 북적거리며 지낼 수가 없어 현미와 백미를 바깥에 두었는데, 미루고 있을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당장 실내에 들여보낼 준비를 했다. 사실 특별한 준비랄 건 없고 크레이트를(드디어) 사고, 마음의 준비만 하면 될 뿐이었지만, 모든 일이 막상 해 보지 않으면 겁만 더 나게 마련이었다. 주변 친구들도 중형견 세 명을 어떻게 다 같이 키우냐며 걱정을 했지만 해보니 다 됐다. 다만 첫날은 보리랑 어떻게 지낼지 알 수 없어서 친구에게 보리를 이틀 밤 정도 맡아달라고 했다.

 

처음엔 백미와 현미를 저녁에만 집에 들여서 생활해 보기로 했다. 낮 시간에는 집에 사람이 없기도 하고, 개들도 답답할 테니 마당에 묶어 두고 밤에만 함께 지내보자고 한 것이다. 친구에게 낮 동안 보리를 부탁할 수도 없으니, 이틀 정도만 밤에 부탁하면 개들도 실내 생활에 적응을 하겠지. 첫날과 둘째 날 모두 생각보다 훨씬 수월했다. 씻고 집에 들어와 말리는데 뭔가 눈치를 챘는지, 잘 보여야겠다 싶었는지 어쩐지 드라이도 얌전히 잘 참고, 원래 집에 있었던 녀석들 마냥 자연스럽게 잘 녹아들어 우리가 놀랄 정도였다. 처음에는 모든 공간을 개방하지 않고 거실과 부엌만 열린 공간으로 두고, 그 외 공간을 왔다 갔다 했는데, 긴장이 무색할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개들을 데리고 들어오기 전까지 별로 준비랄 건 없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고민하고 마음의 준비도 했는데 사실 그런 건 별로 필요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다 씻고 나서는 쉬고 있는 내 곁에 와서 얌전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아무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준 적도 없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본 적도 없을 것이었다. 마당에서 지낼 때도 수시로 만져주고, 산책을 가거나 카페에서도 차분하게 앉아 시간을 보내는 걸 해 보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도 개도 완전히 풀어져서 함께 쉬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 안과 밖의 구분이 중요한 건 인간뿐인 것 아닐까. 개들에게는 안이든 밖이든 다를 게 없고 자기가 좋아하는 인간이 얼마나 편한 마음으로 자기를 바라봐 주는지 그것만이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개들이 안에 들어와서 뭔가 물거나 뜯거나 배변을 하며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거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인간의 편견일 뿐일 수도 있지 않을까. 개들은 안이든 밖이든 심심하면 뭔가 놀잇감을 찾으려고 하고, 스트레스가 있으면 짖을 수도 있다. 배변이 하고 싶으면 자기가 생활하는 공간에서 가장 먼 곳을 찾아서 한다. 묶여 있던 개가 산책을 나가면 그때야 참았다는 듯이 오줌을 누고 똥을 누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자기가 참을 수 있는 만큼은 참겠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면 줄에 묶여서라도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가서 볼 일을 보는 것이다. 오랜만에 아이비를 만났을 때 산책을 나가도 한동안 전혀 배변활동을 하지 않는 모습을 봤다. 집에 와서 발작을 하면서 소변을 봤고, 발작을 하고 난 후에 돌아다니다 내 이불 위에 소변을 봤다. 아마 아이비에게는 묶여 있던 삶 중에 누군가 나타나 종종 산책도 시켜주고, 먹을 것도 주고, 새끼들을 낳았을 때는 안전한 공간에 와서 겨우 적응이 되었는데 다시 원래 지내던 곳으로 돌아가 의지하던 사람도 더 이상 오지도 않고, 먹을 것도 없고, 산책도 할 수 없는 생활로 돌아간 것이 견디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 충격 때문에 발작 증상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시고르자브종’이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그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요즘에는 그런 추세가 조금 줄어드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 말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는 마당에 돌아다니는 새끼 강아지들이나, ‘토종개’가 마당에 묶여 있는 모습이 전형적인 시골의 이미지가 있었다. 마치 밈처럼 ‘시골 외할머니댁에 갔더니’와 같은 제목으로 시골집 마당의 억울하게 생긴 강아지 사진들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마치 명절의 정겨운 풍경 같지만 그 강아지들이 어떻게 자라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그렇게 귀엽던 아이들은 대개 3개월 무렵이 되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제 호기심을 채울 나이가 되면 애물단지로 전락한다. 그전에 귀엽다고 남의 집에서 데려간 강아지들도 마찬가지일 확률이 크다. 그렇게 되면 돌아다니지 않게 강아지들을 묶어 놓는다. 함께 살기 위한 교육을 시작하거나, 강아지가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려는 노력은 없다. 그저 그때부터는 묶여서 오다가다 머리나 한 번씩 만져주면 다행인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강아지는 아주 어릴 때부터 묶인 채 평생을 지내게 된다. 산책은 사치이고, 먹이나 제대로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다. 적절한 환경과 깨끗한 음식, 병에 대한 예방과 치료, 정기적인 산책 같은 것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강아지들을 구조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마당에서 지내더라도 그 정도의 보살핌만 받을 수 있다면 입양을 보내겠다는 의견도 있는 것이다. 마당에서 묶여 지내는 강아지들이 없어지는 것과, 마당에 사는 강아지들도 모두 적절한 보살핌을 받는 것, 어느 쪽이 더 이루기 쉬운 과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요즘 우리 동네에서 산책하는 ‘믹스견’들이 많아지는 것을 보면 이렇게 조금씩 다라지고 있는 것일까 조금 희망을 가져보기도 한다. 목장갑까지 끼고 강아지 산책을 하는 아저씨들이 종종 눈에 띈다. 보리 산책길에 매일 만나는 아이들도 있는데, 마당에 두 마리가 묶여 있어 우리가 산책할 때면 늘 무섭게 짓고 했었는데, 아저씨가 산책을 시작한 후로 확실히 짖음이 덜 해지는 걸 느낄 수 있아갔다.

 

시골에서 개들이 묶여 지내는 그림이 눈에 익어 익숙하고 자연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어떤 존재든 평생 줄에만 묶여 살면서 적절한 보호도 받지 못한다면,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클지 상상해 보면 쉽지 않을까. 7-8년 전쯤 제주에 공연차 와서 다닐 때 개들이 길에 자유롭게 늘어져 있어서 신기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힘들게 고생하며 떠돌아다닌다기보다 그냥 그늘 아래 한가하게 몸을 늘어뜨리고 쉬는 모습이었다. 제주도에서는 개들도 느긋하게 사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사람이나 가축,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는 들개의 모습이 아니라, 마을에 속해서 함께 어울려 사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제주 유기견센터의 안락사율이 전국 1위 수준이라고 한다. 그만큼 유기견 보호소에서 지내는 개체 수가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개를 줄에 묶지 않고 자유롭게 지내도록 하는 건 섬 지역이라서 갖는 특성이라고도 하는데, 실제 인구도, 관광객도 늘어난 지금은 개들을 풀어서 키우는데 따른 위험성도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고, 마을 주민이 풀어서 키우거나, 잠시 풀어주고 산책하고 돌아오라고 했거나, 혹은 답답해서 줄을 풀고 나온 개들이 들개, 유기견으로 신고되어 보호소에 입소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래서 제주도를 여행할 때 발견한 유기견을 무턱대고 신고하지 말라고 하는데, 일리가 있는 말이다. 시간을 들여 개의 주인을 찾아주거나, 주인을 찾지 못할 경우 당분간 보호할 의지도 없다면 가던 길을 가는 것이 좋겠다. 정 마음이 쓰인다면 마실 물이라도 조금 챙겨주던가. 실제로 어떻게 만난 인연이든 개를 책임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얘기는 따로 또 할 얘기가 많으니 미뤄두기로 하자.

 

예전에 제주에 왔을 때 길에서 쉬던 개들의 모습이 여행객의 눈으로 봤기에 한가로워 보였던 것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몇 년 사이 제주에 사는 개들의 형편은 얼마나 더 좋아졌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내가 구조한 개들처럼 줄에 묶여 지내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최소한의 먹을 것이나,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공간도 없이 지내는 개들도 너무 많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제주도에 있는 불법 개농장도 40~80곳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적은 숫자는 지자체에서 말하는 숫자이고, 많은 숫자는 단체들에서 조사한 숫자일 것이다.

 

현미와 백미는 묶여 지냈으며, 주인이 있었지만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환경이 관리되지도 않았으며, 그 어떤 보살핌이나 애정도 받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히 모난데 없이 잘 자랐고, 우리 집에 와서도 무리 없이 잘 적응했다. 한동안은 마당에서 지냈지만, 집에 들어와서도 원래 집에서 지내던 아이들처럼 순식간에 적응해서 잘 지냈다. 첫날밤이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둘째 날에는 백미와 현미랑 같이 쉬면서 기타 연습도 했다. 아직은 낯선 공간에서 낯선 소리를 내는 물건으로 어설픈 연주를 하는데도 백미와 현미는 익숙하다는 듯 곁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이 아이들에게는 정말 사람과 같이 있는 시간이 가장 중요한 거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계획에는 한동안 낮에는 밖에서, 밤에는 안에서 지내려고 했는데, 막상 하루 이틀 지내보니 낮 동안 밖에서 흙먼지에 더럽혀진 애들을 닦여서 안에 데리고 들어오는 것이 더 번거로웠고, 보리가 돌아와서 같이 지내기 시작하면 낮에 백미 현미만 따로 밖에 두는 것도 이상해서 자연스럽게 낮에도 안에서 같이 지내기 시작했다. 마침 주말이라 내가 집에 있어서 바로 시작할 수 있었다.

 

한 명씩 데리고 카페도 갔다. 보리한테는 조금 미안했지만, 첫날은 보리랑 백미는 집에 같이 두고 친구랑 같이 현미만 데리고 근처 반려견 동반이 가능한 카페에 갔다. 보리랑은 몇 번 같이 가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던 곳이고, 백미, 현미랑도 해외 입양 관련 미팅하러 나갔다가 때 빼고 광낸 김에 잠깐 들렀는데, 마당에 잠깐 풀어줬더니 둘이 순식간에 찻길까지 뛰어 나가서 식겁하게 했던 적이 있었다. 역시 해맑게 웃으며 금세 돌아오긴 했지만.. 백미 현미랑 있으면서 행복한 기억이 무수히 많은데, 간이 떨어질 뻔 한 순간도 몇 번 있다. 앞서 얘기했던 가출 사건이 그랬고, 한 번은 카페에서, 한 번은 바닷가에서 둘이 같이 순식간에 뛰어가서 없어진 다음, 찾으러 뛰어 나간 우리를 마주 보며 해맑게 웃으며 달려오는 것이었다. 둘이 같이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뛰어오는 모습을 보면 걱정이고 뭐고 굉장히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사실은 가슴이 철렁하는 위험한 순간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보리도 낯선 곳에서는 절대 풀어주지 않는 것이 원칙이고, 줄이 풀리거나 놓쳐서 사고가 나지 않도록 늘 경계하고 조심한다. 개를 키우는 사람들이 튼튼한 산책 용품을 찾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백미와 현미는 부르면 바로 오는 아주 좋은 태도를 가진 개들이지만, 둘이 함께 흥분하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지기도 한다. 우리 집 마당에서 보리까지 셋이 뛸 때는 말 달리는 소리가 났다. 그래도 현미만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하고 단독 외출에 나서봤다.

 

친구와 함께 가긴 했지만 그래도 주 보호자가 한 명뿐인 상황에서 현미와 백미 둘 다 데리고 갈 순 없었기에 혼자 남으면 많이 낑낑거리는 현미를 데리고 나섰다. 현미와 백미에게도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기도 했다. 둘이 어릴 때부터 붙어 지냈기에 의지하는 마음이 클 것 같아서, 떨어졌을 때 힘들지 않도록 한 명이라도 다른 임보처에서 지낼 수 있도록 계속 알아보는 중이었다. 다행히 현미는 혼자만의 외출에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혼자 차를 타 보는 건 처음인데도 안정적이었고, 카페에서도 잘 있기는 했는데 시간이 좀 지나자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뭔가 낯설고 불편함이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한 시간 정도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현미가 아무리 작은 소리로 낑낑거리기는 했어도 주변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 나왔다. 지난번 기억 때문에 마당에서도 풀어놓고 싶지 않았지만(카페 마당에 울타리는 없지만 주인님이 개들을 풀어놓고 놀 수 있도록 만들어둔 공간이기에 콜링에 문제가 없는 아이들을 풀어놓고 놀기도 하는 곳이다) 나오다가 만난 강아지 친구랑 현미가 서로 너무 좋아하며 놀고 싶어 하고, 상대 견주분이 잘 노는데 풀어주면 어떻겠냐고 하셔서 한 번 풀어줘 봤다. 현미 혼자 있으니까 멀리 안 갈 거라는 생각도 했다. 현미는 믿음에 부합했고, 심지어 평생 있지 못할 감동적인 순간도 선물해 줬다. 상대 강아지가 현미를 무척 좋아해서 둘이 뛰어다니며 신나게 놀았는데, 현미가 갑자기 멈추더니 매우 급한 표정으로 나를 찾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이내 나를 발견하고는 무척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뛰어왔다. 현미가 멈춰서 나를 찾던 표정, 그리고 나에게 뛰어오던 순간의 표정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 순간을 영상으로 찍어 놓지 못한 것이 아쉬웠는데, 영상은 없어도 나는 그 순간을 기억할 수 있다. 현미가 왜 갑자기 그 순간 나를 찾았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놀기 시작했을 때 있던 곳에서 조금 옆으로 이동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잠깐 당황했지만 내가 마땅히 주변에 있을 것을 알고서 찾는 표정이었고, 나를 발견했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나라고 느껴지게 하는 표정이었다. 개들의 표정이 사람과 같을 리 없고, 개들의 생각도 사람이 멋대로 짐작하는 게 많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그 순간 현미의 감정은 내가 생각한 것과 많이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내가 현미에게 신뢰를 받고 있고, 안심하게 해 주는 존재라는 것이 행복했다. 백미, 현미와 지내면서 감동적인 순간들이 많았지만 나는 그 찰나 현미의 표정이 내게는 최고의 순간이라고 말할 것이다.

 

백미만 데리고도 카페에 갔다. 보리랑은 여러 번 갔던 곳인데, 골든 레트리버 한 명이 상주하고 있고, 넓고 트인 공간이라서 개를 데리고 가기에 부담이 덜 한 카페였다. 처음 백미와 현미를 데리고 나온 날, 우리는 모두 백미가 현미보다 더 쉽게 입양을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백미가 조금 더 통통하고 귀여운 인상이었던 데다 덜 예민해 보였던 것이다. 백미가 지내던 위치는 그전에 보리가 묶여 있던 곳인데, 그나마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마주칠 수 있는 환경이어서 아마 간식이라도 몇 번 더 얻어먹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반면 현미가 지내던 장소는 수풀이 우거진 곳인데, 그 전에는 무무가 지내고 있었고, 우리도 그 아이에게 가까이 가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었다. 수풀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았고, 접근하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무무가 지낼 때는 우리가 정리를 해 줬는데, 떠난 후로 집주인은 전혀 관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집에서도 뒤꼍이라서 현미는 더 못 먹고, 사람과의 접촉도 거의 없이 지냈을 것이었다. 카페에서도 백미가 좀 더 편하게 있는 듯 한 모습을 보였다. 사람들이 와서 예뻐해 줘도 가만히 앉아 있었고, 상주하고 있는 리트리버 친구가 와서 냄새를 맡아도 차분하게 있었다. 한 명씩 따로 시간을 보내보니 개들이 어디 가도 잘 지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더 생겼다.

 

긴 추위를 견디고 봄이 오고 있었다.


 

이 에세이는 배우 서기 님이 제공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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