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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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를 언제 멈추는가 - 뚜벅이 인생

에세이
작성자
KReporter3
작성일
2022-11-04 09:32
조회
251

미운 오리 문과생 치과 의사 되다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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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치과 의사에 대한 이미지가 좋다. 아니 ‘치과 의사’라고 하면 다르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어떤 이들은 ‘돈벌레’라는 생각도 하지만. 특히 치과 진료비가 많이 비싼 미국에서는 더 그렇게들 생각하는 것 같다.

내게도 좋은 이미지의 ‘치과의사’였는데 미국으로 치대 공부를 하러 간다고 하니, 주변에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생각해보면, 제일 가까운 친구들 중에는 잘 다녀오라고 격려하던 친구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진지하게 가지 말라고 붙잡던 친구도 있었고, 문과 전공을 한 내가 견뎌낼 수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하며 거의 비웃는 친구들도 있었다. 엄마마저, 무슨 부귀영화를 누려 보겠다고 그 멀리까지 가서 공부를 하냐며 나를 크게 응원하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내가 고생할 것을 뻔히 알았기에 그랬을 거라 생각한다. 그 모든 친구들의 걱정과 의심을 뒤로하고 나는 희희낙락의 기분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하지만, 미국에 도착해 보니, 나와 비슷하게 치과 대학을 준비하는 유학생들은 나와 격이 달라 보였다. 그들은 나와 다르게 여행도 잘 다니고, 스키도 잘 타러 다니고, 맛있는 것도 잘 찾아 먹으러 다니는 것 같았다. 그제야 왜 친구들이 나를 만류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학자금 대출이라는 것이 있기는 해도 의대나 치대 공부를 하려면 재정적으로도 넉넉하고, 뒷 배가 든든한 사람들이나 해야 하는데, 한국보다 학비와 생활비가 몇 곱절이 더 드는 이 미국에서 치과 대학 진학이라니. 나는 이 잔인한 현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 고향은 논밭이 지천이던 깡시골이다. 구멍가게 하나 없는 곳에 버스가 하루에 3번을 다니는 시골 중에 시골이다. 이런 촌구석의 톰보이인 내가 이역만리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미국까지 왔는데 더 이상 무엇을 더 바랄까. 사실 미국 여행 한번 잘 다녀온 것으로 마무리하고 여기서 포기하고 간다고 해도 뭐라 할 사람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비교를 그만 두기로 했다. 목표를 향해 열심히 가야 했기에. 모든 불행은 비교에서 찾아온다기에 비교는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보통사람이기에 자꾸만 비교가 되었다. 비교되는 기분이 들 때마다, 나도 특혜 받은 사람인 것처럼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나도 금수저인 양.

최면을 건다 해도 현실은 달랐다. 드넓은 미국 땅에 차는 신발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나는 미국에 도착하고 차를 살 수가 없었다. 유학생 신분으로 차를 쉽게 사려면 현금이 있어야 했는데, 내 수중에 있던 현금이라고는 달랑 삼백만원이 고작이었다. 자차가 없어도 편하게 다닐 수 있었던 한국이 그립기 시작했다. 그 몇 개월 만에.

한국에서야 3-5분마다 대중교통이 시민들을 어디로든 데려다 주기 때문에 자기 소유의 차가 없어도 어디든 잘 다닐 수 있고, 오히려 차는 교통난, 주차난에 애물단지가 될 수 있었지만, 미국은 이야기가 다르다. 덜덜거리는 경운기 같은 차라도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처음 몇 개월은 일종의 미국을 탐색하는 시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큰 돈이 들 만한 사건들을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기숙사에서 숙식을 해결하니 별로 외출을 할 일도 많이 없었고, 사교생활을 할 일도 많지 않았다. 어쩌다가 건넛 방에 사는 예쁘게 생긴 인도인 친구가 주말이 되면, 나를 캘리포니아 어느 바닷가로, 혹은 인도 축제를 구경시켜주러 이곳저곳으로 나를 데리고 다녔던 것 빼고는 딱히 외출이 없었다.

다행히 한국에서부터 알고 지냈던 몇몇의 친구들과 선배들이 더러 있었기에, 가끔 먹거리를 장만할 때는 를 끼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들의 도움을 잘도 받았다. 그들도 다른 유학생과는 다르게 그다지 반짝거리는 차는 아니었다. 그것 때문인지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이런 유학생들 덕분에 나도 조금 위로가 되었다.

차가 없던 나를 도와주던 선배의 는 소리가 많이 나서 덜덜거리고 에어컨도 안 되는 차였다. 그 차를 타고 한 시간 가량, 한인 마트까지 미국 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내 얼굴은 가장 못생기게 된다. 시원한 에어컨이 필요한 뜨거운 여름날, 오픈카를 자랑하려고 일부러 뚜껑을 열고 달리는 꼴이었다. 더위를 못 이기고 차 창문을 다 열어젖히고 바람을 세차게 맞는다. 80마일(128키로미터)의 속도로 달리는 고속도로 위에서 내 입술은 ‘달려라 하니’에 나오는 홍두깨 선생님 부인, 고은애의 입술이 된다. 하지만, 나는 그것마저 부러웠던 1이었다.




그런데, 어느 일요일 아침, 갑자기 기발한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보이는 마트로 걸어갔다 오는 것이 매우 수월해 보였다. 옷을 주섬주섬 입고, 호기롭게 길을 나섰다. 왠지 그날은 누구의 도움 없이 장을 보러 가고 싶었다. 아침이 가장 해가 덜 뜨거우니 금방 다녀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얼마 전, 캘리포니아에 딱 어울릴만한 것으로 월마트에서 슬리퍼를 장만한 것이 기억났다.  슬리퍼를 신고 운동하는 기분으로 기숙사를 나섰다.

학교에서부터 그 마트가 보였기 때문에 곧 다다를 것 같아 이미 신이 나있었다. 10-20분 정도면 도착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걸어가 보니, 금세 다다르지는 않았다. 40분 정도가 걸렸다. 뭐 이 정도야 운동으로도 할 수 있으니 괜찮았다.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카트에 담고 계산을 마쳤다. 계산하고 봉지에 담은 물건들이 양속 가득이었다. 아차차! 돌아갈 때 짐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마트 안에서만 쓰는 카트를 가지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지만, 그 무거운 짐들을 양손에 들고, 기숙사를 향해 걸어갔다. 최대한 천천히. 처음부터 힘을 다 빼면 안 되니 살살 걸음으로 기숙사로 향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운동화를 신고 나올 것이지, 더운 여름이니 슬리퍼가 제격이라 생각했던 나의 판단이 후회가 되었다.

엄지발가락과 두 번째 발가락 사이에 걸쳐 있는 슬리퍼 고리는 살을 이미 있는 대로 비벼놓아 물집이 잡히기 직전이었고, 그 가볍던 슬리퍼가 왜 그리도 무거운지, 발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걷는 느낌이었다. 최대한 발의 무거운 느낌을 잊어버리려고, 저 멀리 보이는 기숙사 건물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옆으로 쌩쌩 지나가는 차들이 부럽다 못해 짜증이 났다. 왜 영화에서 그렇게들 히치 하이킹을 하는지 이해가 갔다.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훅훅 올라왔지만, 참았다. 여권도 없고 신분증도 안 가지고 나온 이 상황에서 혹시라도 국제미아가 될지도 모르니.

인도를 따라 걷다가 지름길처럼 보이는 흙길로 길을 틀었다. 짧은 바지를 입었던 터라, 길게 자란 이름 모를 풀들이 종아리를 세차게도 쓸어 버린다. 어쩔 수 없다. 차리리 빨리 이 여정을 끝내버리는 게 낫지. 종아리 쓸리는 게  대수람. 이제 반도 안 왔는데, 짐을 든 양손과 어깨는 점점 더 무거워진다. 마트에서 귀하게 산 짐들을 아예 하나씩 버려버릴까 아니면 한두 개씩 먹으면서 갈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해는 이미 정오를 향해 가고 있었기에 더 뜨거워졌다. 갑자기 여름방학이 되면, 국토대장정을 한다던 내 또래의 친구들이 생각이 났다. 그 친구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차라리 내가 국토대장정이라도 했었다면, 걸어서 왕복 2시간 남짓의 장보기 미션쯤이야 식은 죽먹기로 생각했을 텐데. 그래도 그 친구들은 나처럼 무거운 슬리퍼는 신지 않았겠지. 배낭을 맺을지언정, 양손에 마트 꾸러미는 없었겠지. 나는 이 낯선 땅에 와서 별거 아닌 이런 걷기 미션으로 세상 다 산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핸드폰이 있었다면, 누구에게라도 SOS를 쳤겠지만, 한국에서는 그렇게 흔하게 들고 다녔던 핸드폰도 그 당시 나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차도 핸드폰도 없는 그저 세상 가난한 유학생 코스프레를 제대로 하고 있었다. 뜨겁고, 덥고, 목마르고, 무겁고, 졸리기까지 했다. 생각해 보니 설상가상으로 공복이었다. 배가 고팠다. 제대로 노숙자가 된 기분이 느껴졌다. 단순히 미국 어느 차길 옆, 인도 위를 걷고 있는데   설움을 느끼고 있다니. 차없는 설움이겠지.

짐이 무거우면 잠시 쉬면 됐을 텐데, 마트에서 기숙사까지 가는 길은 건물 하나 거의 없는 허허벌판이었고, 일요일이라 그나마 띄엄띄엄 있던 상점들 마저 모두 닫혀있었다. 그늘 아래로 피할 만한 나무 한 그루, 앉아서  만한 의자 하나 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점점 뜨거워지는 한낮의 해 때문에 걸음을 멈추는 것이 더 두려웠다. 땀은 눈썹을 타고 내려와 눈이 따끔거렸다. 땀을 닦을 수건조차 없었다. 나는 그저 계속 걸을 이었다.

계속 걷고 있는데도 목적지는 왠지 더 멀어져 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사막에 갇혀버린 어떤 사람이 오아시스를 찾으려고 헤매는 사람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신기루인 건지 아니면 오아시스인 건지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데도 언제 다다를지도 모르는 그 아득함이란. 사막 지옥에서 걷기 형벌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단테의 신곡에 사막 지옥이 있었던가.

언제 도착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내 발은 물집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종아리는 들풀에 무참히 쓸려 따끔거렸다. 갈 때는 40분이었지만, 올 때는 1시간이 넘게 걸린 것 같았다. 방바닥에 짐을 다 내팽개쳐 버리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나는 침대에 그대로 누운 채, 그날 오후와 밤까지 제대로 몸살병이 걸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발에 걸쳤던 슬리퍼는 쓰레기통에 처넣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시간 가량을 걸었던 슬리퍼는 내 발만큼이나 이미 너덜너덜한 상태이기도 했다. 월마트에서 10불 주고 산, 중국산 슬리퍼는 값싸고 보기 좋은 슬리퍼였지만, 다시는 거들떠보기 싫은 물건이 되어 아예 눈앞에서 치워버렸다. 물건을 버린 게 아니라 그날의 기억을 버린 것이었다.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버리긴 했지만, 그 슬리퍼의 모양과 색깔, 그 무게까지도 나는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조금이라도 비슷한 모양이나 색깔의 슬리퍼를 보면, 그때의 기억이 확 하고 떠올라 비슷한 색이나 모양의 신발은 절대로 사지 않는다. 그날 아침 신나게 걸어 나갔던 기억과 돌아올 때의 죽을 이었던 기억까지 함께 짬뽕이 되어 나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뜨거웠던 캘리포니아 여름 하늘 아래, 두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이 바짝 말린 오징어처럼 되어버렸지만, 배운 게 있다. 걷기를 중간에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 걷기를 포기하려면 나를 쉬게 해주는 휴식처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 걷기를 포기하지 않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없는 열악한 환경이어야 한다는 것, 발에 물집이 잡히든, 목이 마르든, 배가 고프든, 해가 뜨겁든,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쉬지 않고 가는 것이 가장 최선이라는 것이었다.


대도시를 제외한 미국에는 한국처럼 인도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처음에는 차도 옆, 인도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아무런 생각이 없었지만 그날 마트 여정 이후, 미국의 뚜벅이들을 보면, 그들이 왜 저렇게 걸어 다닐 수밖에 없는지, 그들이 왜 차가 없이 다니는지, 이런저런 생각들이 든다. 걷는 그들의 얼굴 표정눈빛, 그들의 행색을 더 자세히 보게 된다. 사실, 마음 같아선, 차를 세우고 그들의 목적지까지 태워주고 싶은 심정이다. 실제로 한번 그렇게 한 적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 사람이 나를 더 이상한 사람 취급하고 내 친절을 거부했다. 그 다음부터는 순수한 내 마음을 억누른다. 왠지 내가 오해를 사는 것 같아서. 또, 왠지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 같아서.

어찌 됐든 간에, 그 일요일 아침, ‘마트 대장정’을 했던 나는 지금도 인도를 걸어 다니는 미국 사람들을 보면서, 그때 내가 느끼고 경험했던 그 기억이 동시에 올라와 그냥 무심코 지나기 힘들어진 것만은 사실이다. 걷고 있는 그들의 삶이  일이 아닌  같아서이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교통수단 없이 무작정 걸어야만 하는 인생들을 생각해 본다. 걷는 것은 좋은 운동이지만, 운동이 아니라 생계와 생존을 위해 걸어야만 하는 이 세상의 모든 뚜벅이들이 얼른 목적지에 다다르면 좋겠다.


 

이 글은 브런치 작가 시애틀 닥터오 님이 제공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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