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시

케이시애틀 연재 에세이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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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국 고등학교 교사 (완결) | 시애틀로 간 백미와 현미 (완결) | 나의 첫 포틀랜드 (완결)

길고 긴 시간 끝에

에세이
작성자
KReporter3
작성일
2022-11-11 08:37
조회
169

나의 첫 포틀랜드 (3화)

 

입국 심사는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나름의 악명 높은 구간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무거운 백팩과 크로스백을 등과 어깨에 사이좋게 지고 길고 긴 줄을 만드는데 일조하며 얼른 심사가 이루어지길 기다렸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정말 한 시간은 그렇게 서서 기다렸던 것 같다. 왠지 모르겠지만 입국 심사관들은 우리 앞에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계속 다른 사람들과 함께 멀뚱멀뚱 서서 그들을 기다렸고 그 시간이 아마 체감상 제일 힘들었던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긴 시간을 기다리고 나니 드디어 심사관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입국 심사를 시작하는구나.' 약간 긴장은 됐지만 설렘도 찾아왔다.

 

미국 입국 심사는 상당히 까다로운 것으로 유명하다. 사전 조사 시, 그 부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었고 그에 따라 대충 어떤 질문을 하고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찾아보기도 했었다. 여기서 잘못 걸리면 그야말로 비상사태. 혼돈의 시간 속을 홀로 헤엄쳐야만 하는 것이다.

 

입국 심사는 꽤나 느리게 진행됐다. 심사관도 아까 얼굴을 비쳤던 그 한 명뿐이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기다리는데 달랑 한 명으로만 일처리를 한다니. 미국에선 기다림의 미덕을 수양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저리다 못해 아픈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하며 내 차례가 오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 와중에 입국 심사가 너무 지체돼서 비행기를 놓친 사람도 있었다. 나는 아찔한 그 상황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대기시간을 넉넉하게 잡아 항공편을 예매했다. 만약 내가 비행기를 놓친 사람이었더라면 정말이지 울고 싶었을 거다.

 

느릿느릿 움직이지만 그래도 줄어드는 줄을 보니 점점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앞사람이 한 명, 두 명 혹은 네 명씩 사라질 때마다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뜀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내 차례 땐 과연 어떤 질문이 오고 갈지 감히 예상조차 안 되는 상황 속에서 제발 영어를 잘 알아듣고 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어딘가 근엄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표정의 심사관을 마주하기 5초 전, 나는 전쟁터에 나가는 용맹한 전사처럼 비장함을 한껏 뽐내며 앞으로 전진했다.

 

"하이."

 

드디어 마주하게 된 입국 심사관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고 미리 준비해 둔 서류를 내밀었다. 혹시 제출해야 할 중요한 문서를 빠트릴 수 있으니 미리 파일에 정리해둔 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학생 비자(F-1)를 받아 갔는데 보통 학생 비자인 경우엔 심사가 그리 혹독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기본적으로 물어볼 것 같은 질문에 당황하지 않고 즉각 맞받아칠 수 있을 정도의 준비만 단단히 하고 있었다. 심사관이 서류를 바탕으로 확인 절차를 위해 나에게 몇 가지 물어봤고 나는 그저 두어 번 정도 "네."라는 대답만 했다.

 

"혹시 김치 같은 음식도 가져왔어?"

"오 아니요."

 

심사관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 끝났다며 가도 된다고 말했다. 나는 1분도 걸리지 않은 듯한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동그란 두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다 된 거예요? 정말? 끝난 거라고?"

"그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간단하고 별 거 없는 입국 심사에 느닷없이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 들어 정신이 얼얼했다. 하지만 곧바로 정신을 바로 잡았다. 헤쳐나가야 할 이 모험의 다음 단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을 유유히 빠져나와 앞에 놓인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천천히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맡긴 채 수많은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광경을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우선 내가 해야 할 일은 여행용 가방 두 개를 찾는 일이었다. 시애틀 공항에서 탑승하기 전에 한국에서 부친 짐을 다시 되찾아 최종 목적지인 포틀랜드로 부쳐야만 했다. 내가 가장 걱정했던 일이 바로 이 일이었다. 과연 아무 문제없이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한 두 걸음 걸으니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승무원 두 명이 보였다. 그들은 무수히 많은 여행용 가방에 둘러 쌓여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여기서 가방을 찾는 건지 물었고 그들은 맞다며 여기서 짐을 찾아가라고 답했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회색과 진회색의 가방을 찾기 위해 바삐 움직였는데 어째선지 내 가방은 눈에 쉽게 띄지 않았다. 혹시나 분실당한 건 아닌가 하고 겁먹으려던 차에 세일러문에 나오는 분홍머리 꼬마 세라 스티커를 턱 하니 붙인 가방 두 개가 눈에 띄었다. 가방을 찾을 때 조금이라도 눈에 쉽게 띌 수 있도록 일부러 붙여놓은 것이었다.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양손에 가방을 하나 씩 쥐고 다음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러 재촉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되찾은 이 두 개의 짐을 다시 부치는 일이었다. 하지만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어디에서 짐을 부쳐야 하는지 안내해주는 표지판이나 사람을 발견할 수 없었고 나는 곧바로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용기라는 바람이 시원하게 흘러들어와 경직된 내 몸을 살랑살랑 뒤흔들기 시작했다. 마치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내게 일러주는 듯했다. 나는 곧바로 공항 직원으로 보이는 한 남자에게 다가가 양손에 쥐고 있는 가방 두 개를 앞에 내보이며 대충 짐을 어디서 부쳐야 하는지 눈으로 물어보았다. 다행히도 단번에 눈치챈 직원이 무어라 말을 하며 짐을 부쳐야 할 곳을 가리켜 주었고 나는 "포틀랜드?"라고 다시 물어 남자의 확인을 받은 뒤에야 위풍당당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짐을 부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임무를 완벽하게 해내고 나는 스스로가 자랑스럽다고 여겨져 정말 뿌듯했다.

 

짐을 부쳤으니 이제 보안 검색대를 무사히 통과하고 공항 내 트레인을 타기만 하면 시애틀 공항에서 내가 해야 할 임무는 끝이었다.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보안 검색대로 가 소지품과 한쪽 귀에 꽂고 있던 에어팟 한쪽을 바구니에 차곡차곡 넣고 보안 게이트를 지났다. 뒷사람이 나오기 전에 바구니에 들어있는 소지품을 다시 가방에 넣고 외투와 신발을 챙겨 최대한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짐을 다 챙기고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방금 막 보안 게이트에서 나와 바구니에서 자신의 짐을 챙기던 한 여성이 나를 불러 세웠다. 꽤나 진지한 표정을 하고선.

 

"잠시만! 이거 혹시 당신 건가요?"

여성의 손엔 내가 아까 게이트를 통과하기 위해 빼놓은 에어팟 한쪽이 들려있었다.

 

"오 맙소사!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너무 조그마해 눈에 잘 띄지 않는 에어팟을 받아 다시 귀에 꽂고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큰일 날 뻔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표정을 한 채로.

 

또 하나의 큰 관문인 트레인을 타기 위해 지도를 보며 내가 내려야 할 게이트를 머릿속에 새기다 뜬금없이 아직 세상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길을 잃었을 땐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낯선 곳에서 (그곳이 생김새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로 가득할지라도) 방황할 때 도움을 요청하면 거리낌 없이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일러주고 내가 덜렁대서 물건을 떨궜을 땐 누군가가 발견하고 내 손에 다시 쥐어줄 터였다. 줄곧 사람들은 타인에게 호의를 쉽게 베풀지 않는다고 믿어왔던 나의 어리석은 편견은 내가 건넨 도움을 받아 준 공항 직원과 보안 검색대 바구니에서 영영 잃어버릴 뻔한 유일한 친구인 에어팟 한쪽을 챙겨준 한 여성에 의해 깨트릴 수 있었다.

 

시애틀 공항에서 경유하기 위해선 공항 내에서 운행 중인 트레인을 타고 해당 게이트에 가야만 했다. 대체 뭐가 이렇게 복잡한 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생소한 환경에 처한 탓에 온몸의 신경은 극도의 긴장감에 곤두섰고 쿵쿵거리던 심장은 순식간에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트레인에서 잘못 내려 길을 잃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전광판과 지도를 번갈아보다 곧바로 트레인이 들어오기에 망설임 없이 올라탔다. 내가 내려야 하는 게이트엔 (A였는지 C였는지 S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순식간에 도착을 했고 트레인에서 내리자마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그곳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보통 서양인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쉽게 분간하긴 어려웠다. 그들 사이에서 거대한 백팩과 무거워 보이는 크로스백을 맨 동양인은 유독 눈에 띄는 느낌이었다. 나는 탑승구 주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기다리기 위해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진정한 깍두기가 된 것만 같았다.

 

비행기를 타기까지 무려 3시간이나 남았다. 입국심사를 포함해 시간이 꽤 소요될 것을 예상하고 환승 대기 시간이 긴 항공편을 예매했다. 부족한 것보다 여유로운 게 백번 천 번 낫다는 생각에 선택한 시간은 5시간이었다. 입국심사로 1시간 넘게 시간을 보내고 짐을 다시 부치고 트레인을 타는 데엔 30분 남짓 걸린 것 같다. 한두 시간이면 모르겠는데 세 시간은 왠지 너무나도 까마득해 보였다. 기다리는 동안 뭐라도 할까 싶어 의자에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론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몇몇 상점들이 눈에 띄었다. 나도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구경이라도 할까 싶었지만 오랫동안 서 있어서 그런지 좀처럼 움직이기가 싫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화장실에나 한번 다녀온 뒤 의자에 앉아 사람 구경이나 해야겠다고 결정했다.

 

나는 시애틀 타코마 국제공항에 있는 동안 보안 검색대를 통과할 때를 제외하곤 계속 에어팟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외롭고 쓸쓸한 내 곁을 지켜준 유일한 친구였다. 멀뚱멀뚱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으려니 너무나도 심심했다. 영상이라도 보면 시간이 금방 갈까 하여 유튜브도 틀어보고 넷플릭스도 들락날락했지만 도무지 집중이 안돼 감상하고자 하는 흥미가 떨어졌다. 그때 한국은 새벽이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연락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당시 사귀던 남자 친구가 그때까지 깨어있어서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두 시간 가까이 그 애와 통화를 했고 덕분에 긴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그렇게 통화를 하니 어느새 한국은 새벽 네다섯 시가 되어 가고 있었고 그 애가 금방이라도 잠에 취할 것 같은 목소리를 내길래 이만 통화를 끊었다. 통화를 끊고 나니 나도 갑자기 졸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긴장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걸까. 눈이 계속 감기기 시작했다. 잠에 들면 자칫 비행기를 놓칠 가능성이 높기에 악을 쓰고 버텼다. 이제 한 시간만 기다리면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포틀랜드로 가는 마지막 여정이었다.

 

힘겹게 졸음과의 사투를 벌이다 비행기 탑승 시간 10분 전에 직원에게 다가가 비행기를 탈 수 있냐고 물었다. 그 누구도 큰 소리로 탑승을 시작한다고 말해주지 않아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가 탑승할 수 있다고 말하자마자 나는 표를 보여주고 비행기에 올랐다. 상당히 아담한 사이즈의 기내로 들어와 짐을 올려놓고 자리에 앉으니 긴장이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다 끝이다. 나는 큰 문제없이 모든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했고 더 이상 신경 써야 할 일들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이 비행기에 몸을 싣고 1시간가량 날아 포틀랜드에 도착하면 되었다. 승객을 가득 채운 비행기는 곧 하늘 위로 떠올랐고 마음이 편안해진 나는 끝내 힘들게 붙들고 있던 무거운 눈꺼풀을 지탱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잠에 들고 말았다. 나도 모르는 새에 일어진 일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무대 위에서 강렬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로커처럼 거침없이 머리를 앞뒤로 뒤흔들다 혼자 놀래 잠에서 깨었다. 눈은 돌덩이처럼 무거웠고 뜨려 해도 쉽게 떠지지 않았다. 그 상태로 잠에 들고 잠깐씩 깨길 반복하던 중에 잠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옆자리 승객을 얼핏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놀란 건지 나를 희한하게 바라보았는데 잠에 취할 대로 취해버린 탓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나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계속 잠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깊게 곯아떨어졌던지라 내가 자면서 잠꼬대를 하거나 너무 피곤한 탓에 코를 심하게 골았을지도 모른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포틀랜드에 거의 도착을 할 때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서야 내가 실수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부끄러웠다. 하지만 너무 피곤해서 일어난 일이고 이미 지나간 일이니 훌훌 털고 일어나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도 여전히 투명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말이다. 한 시간 가량 곯아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눈은 아직도 천근만근이었다. 그냥 이대로 길바닥에 쓰러져 잠에 들고 싶을 정도였다.

 

아! 드디어 포틀랜드였다. 나의 최종 목적지이자 몇 달간 내 삶의 터전이 되어줄 지상 낙원에 도착했다.


 

이 에세이는 브런치 작가 김수연 님이 제공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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