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 시

케이시애틀 연재 에세이 시리즈:

38살, 박사 유학을 떠나다 | 될 때까지 하는 영어 회화 도전기 | 미운 오리 문과생 치과 의사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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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새벽

에세이
에세이
작성자
KReporter3
작성일
2022-11-28 01:30
조회
487

될 때까지 하는 영어 회화 도전기 (9)

 

영어 공부를 위한 미국행을 결심한 후 무비자로 지낼 수 있는 기간인 90일 동안 체류할 계획을 세웠다. 여러 도시를 물색한 후 대중교통으로 이동이 가능하면서 사람들을 만나서 소통할 수 있도록 대학가가 있는 도시를 찾았다. 비행기를 멀리 타고 가고 싶지 않아 서부 도시 중에서 물색을 하던 도중 대부분의 도시가 시애틀을 경유해서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애틀은 한국에서 비행 거리도 제일 짧고 내가 찾던 조건들과도 맞아떨어졌을뿐더러 iCalry의 배경이 되는 도시이기도 했다. 시애틀로 목적지를 정한 뒤에는 영어학원을 검색하였다. 학원비와 숙식비까지 하면 3달간 체류비만 천만 원이 훌쩍 넘어갈 것 같았다. 자칫 예산 초과가 되면 인턴 때 모아둔 돈으로는 감당이 안될 것 같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문제는 미국 영어 회화 학원도 한국 학원과 마찬가지로 원어민이 아닌 외국인 학생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많다고 하였다. 외국인 학생들과의 대화하기 위해 미국에 가는 것은 한국에서 학원을 다니는 것과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았다.

외국인과 소통을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생각하기로 하였다. 당시 나는 2008년부터 7년간 틈틈이 운동을 하여 주짓수 보라띠를 매고 있었다. 주짓수는 흰띠 파란띠 보라띠 갈띠 검은띠의 다섯 단계로 승급체계가 구분되어 있으며, 한 단계를 올라가는데 대략 2년의 수련 기간이 소요된다. 보라 띠는 보통 4-5년가량 운동을 하여 체육관에서 사범을 할 정도의 실력에 해당이 되기 때문에 주짓수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면 사람들과 친해지기 유리할 것 같았다. 체육관 회비는 한 달에 20만 원 정도밖에 안 했기 때문에 영어 학원에 비교하여 비용적 부담도 확 줄어들었다. 시애틀의 워싱턴 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 이하 UW) 근처에 있는 주짓수 체육관들을 검색하여 한 곳을 가기로 결정한 후, 그 체육관 근처의 숙소를 에어비앤비를 통해 한 달치를 예약하였다. 숙박비가 비쌌기 때문에 한 달간 지내면서 더 조건이 좋은 숙소를 찾아보려고 생각했다.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면서 사람들과 영어로 소통할 기회를 갖고 나머지 시간에는 영어 공부를 지속하기 위해 iCarly DVD와 정리한 노트를 챙겼다. 도복과 영어공부에 대한 준비를 마친 후 2015년 5월에 31살의 나이로 난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시애틀의 다운타운에서 며칠간 관광을 하며 지낸 후 목적지로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였다. 사람이 많지 않은 버스에서 앞자리에 앉아서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가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도심을 벗어나자 주변 풍경은 미국 영화에서 보는 2층 가정집들이 쭉 즐비한 곳이 나왔다. 주택가 근처를 지나면서 탑승한 청바지에 면티를 캐주얼하게 입은 60세 정도의 건장한 백인 남성이 나에게 관심을 보이며 말을 걸어왔다. 자신을 하얏트 호텔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스캇이라고 소개한 그는 나에게 어디서 왔는지, 미국에 왜 왔는지, 얼마나 있는지, 어디로 가는 길인지 이것저것 관심을 보이며 물어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도착지에 가까워지자 스캇은 자신의 집이 내가 묵을 숙소와 멀지 않다며 버스 정류장에서 숙소까지 거리가 있으니 직접 같이 가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스캇이 시간이 많은 나이스 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였고, 이렇게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 있는 도시로 오다니 지역을 정말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스캇은 내가 숙소에 짐을 푼 후 필요한 것이 많을 것이라며 자신과 함께 핸드폰을 사고 장을 보러 가자고 하였다. 다시 한번 뭐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 다 있나 생각을 하였고, 스캇 덕분에 근처 가게에 가서 핸드폰과 유심칩을 구매할 수 있었다. 같이 장을 보러 갔을 때 내가 돈이 많이 없으니 cheap 한 물건을 사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자, 스캇은 마트에 low price 한 물건이 많다고 하였다. cheap과 low price의 차이가 무엇인지 묻자 스캇은 low price가 cheap보다 더 젠틀한 표현이라고 했다. 스캇은 내가 궁금한 영어 표현을 물을 때마다 위와 같이 친절히 대답을 해주었고 나는 스캇을 통해 쉽다고 생각한 기본적인 영어 표현들 조차 제각기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어에서는 반말과 존댓말로 언어 표현들이 이분화되어 존재하지만, 영어에서는 좀 더 다양하게 상대를 존중하는 우회적인 표현들이 존재하였고, 이러한 표현들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을 경우 상당히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캇은 좋은 영어 선생님 같이 느껴졌고 이런 사람과 3달 내내 같이 지내면 영어 실력이 많이 늘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스캇에게 고마운 마음에 저녁 식사를 사준 후 헤어지려 하였지만, 스캇은 식사 후 자신이 살테니 술을 한 잔 같이 하자고 하였다. 이미 밖은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 사람이 많아 승낙을 하였다. 그런데 스캇은 술을 마시면서 성적인 이야기들을 나에게 하였다. 족히 60살은 되어 보였던 그가 여러 20대의 아시안 여성들과 잠자리를 가졌다는 이야기였다. 미국은 성에 개방적인 곳이니 그런가 보다 생각을 하며 듣고 있는데 스캇은 점차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한 말과 행동을 하였다. 내가 주짓수를 하면서 얼마나 몸이 탄탄한지 궁금하다며 내 허벅지를 슬쩍 만져보더니 자신도 힘이 좋다며 팔씨름을 하자고 하기도 하였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했지만, 대화를 하던 도중 뜬금없이 'I like your teeth.'라며 내 치아가 마음에 든다는 말을 하였다. 나는 이때쯤 되자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긴가민가 하였다. 입술도 아닌 치아가 좋다는 말이 어떠한 의미인지, 성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인지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아까는 여성들하고 잠자리를 한 이야기를 실컷 자랑삼아하였는데, 남자인 나한테 성적인 관심을 보인다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어쨌든 스캇을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미 해가 지고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이만 집에 가자고 하였다. 스캇은 다른 곳에서 한잔 더 하고 가자고 하였지만, 이미 시간은 밤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택시를 같이 탄 후 스캇은 계속 술을 마신채 혼자 집에 가는 게 위험할 수 있으니 나를 숙소로 데려다주겠다고 하였다. '지금 네가 제일 위험하게 느껴지는데?'라고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꾹 참은 채 극구 사양을 했고 거리가 가까운 스캇을 먼저 내려주고 가기로 했다. 스캇은 가는 길에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자신의 집에 일본인 남학생이 하숙을 하고 있다며 그의 사진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나를 그의 집에 데려가고 싶은 게 아닐까 생각을 하던 중에 아니나 다를까 집 앞에 도착하자 스캇은 자신의 집에서 하루를 머물고 가라고 했다. 스캇의 집은 한산한 마을에 있는 2층짜리 단독 주택이었는데 나는 문득 미국식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저 집에도 지하실이 있을 것이고 내가 그 안에 갇히게 되면 설령 내가 소리를 지른다고 해도 아무도 모를 것만 같았다. 아까 나한테 치아가 마음에 든다고 하였는데 혹시 내 이빨을 뽑아서 가지고 싶은 것은 아닐까? 괜히 쏘우 같은 영화가 나오는 게 아니구나 싶기도 하였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스캇을 겨우 보낸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와서 안심을 할 수 있었다.

다음날 나는 바로 주짓수 체육관에 찾아가 등록을 하였다. 다행히도 시애틀의 주짓수 체육관은 나에게 운동과 영어회화를 병행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도보로 5분 거리에 있었고, 체육관 관장님과 관원들은 모두 나를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당시 몸무게가 68kg로 모든 관원 중에 체중이 가장 적게 나갔음에도 100kg에 육박하는 보라띠와 비등비등한 스파링을 하는 모습을 보자 흰띠 및 파란 띠 관원들이 나에게 기술에 관해서 질문을 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성심성의껏 내가 아는 기술들을 설명해주기도 하고 스파링도 함께 하면서 점차 관원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스캇이었다. 스캇은 첫날 헤어진 이후에도 계속 나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하였고,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일주일 가량이 지났을 무렵 오전 7시쯤 아직 잠을 자는 와중에 스캇이 내 방문을 두드려서 잠에서 깨었다. 내가 묵고 있던 숙소는 공용 주택이었기 때문에 정문으로 누구나 출입이 가능한 반지하 방이었고, 내 방 문 앞까지 와서 문을 두드리니 순간 공포감에 휩싸였다. 스캇은 반지하방 창문으로 내가 방 안에 있는 것을 확인했을 것이고 문을 잠가놓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방에 들어왔을 것이다. 나는 스캇에게 돌아가라고 하였으나 스캇은 계속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자고 하였다. 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하고 나서야 스캇은 그 자리를 떠났다. 스캇이 가고 난 이후 집주인에게 연락을 하여 사실을 알리고 대책을 세워달라고 하였으나 일본인 이민자였던 집주인 아주머니는 나한테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별 반응이 없었다. 처음부터 전화도 안 받고 문자로 연락하라며 차갑게 대하더니 참 야박하게 느껴졌었다. 모건타운에서 인도인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숙소에 묵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외국인 이민자들이 운영하는 숙소는 외국인 여행객한테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처를 잘해주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숙소를 옮기고 싶었지만, 아직 3주나 남은 상황이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였다.

그날 체육관에 가서 사람들에게 숙소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스캇이 다시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어보았다. 처음에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주짓수 보라띠가 왜 그런 걸 걱정하냐며 목을 졸라버리라고 농담을 하면서 웃었다. 하지만 스캇이 다시 찾아올까 봐 진짜 무섭다고 이야기를 하자 노아라는 한 친구가 미국에서는 남의 집에 무단 침입을 하면 총으로 쏴도 정당방위가 인정된다며 자신이 직접 스캇에게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하였다. 노아는 스캇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스캇이 오는 것을 원하지 않고 다시 나를 찾아오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노아는 전화를 끊은 후에 스캇이 사과를 하였다고 하며 이 정도 경고를 했으면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노아는 만약에 스캇이 다시 연락을 하거나 찾아오면 경찰에 신고를 하고 상황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도 하였다. 이후로 스캇은 실제로 나를 찾아오지 않았고 나는 시애틀의 남은 기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이후에 안 것이지만 시애틀은 미국에서 동성애와 양성애가 가장 활성화되어 있는 도시 중 하나라고 한다. 그리고 아시아인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사람들을 'yellow fever'라고 한다고 한다. 스캇은 'yellow fever'인 양성애자였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로 나에게 접근을 하였던 것일까 지금까지도 궁금하게 생각되는 부분이다.


 

이 에세이는 브런치 작가 정신적 자유 연구소 님이 제공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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